사부곡(師傅曲) - 일석 이희승 선생 인격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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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곡(師傅曲) - 일석 이희승 선생 인격 체험기
  • 류근조·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인
  • 승인 2019.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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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필자는 감히 189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89년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타계하기까지 어떤 인연으로든 많은 사람이 각자 선생을 통해 받은 감동과 선생을 숭모할 수밖에 없게 된 일화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전말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지 과연 그 실마리라도 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그 동질성 면에선 같다고 해도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일 수도 있기에 나는 이 점을 고려해 그 총체적 은유적 표현을 위하여 최소한의 사실성의 균형적 견인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 점이 곧 이 글의 한계점일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최근 선생의 업적과 생전의 자술내용을 근거로 출판된 회고록 제목의 키워드 “딸깍발이 선비”를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단정은 은유가 지니는 총체성을 그 틀 안에 가둬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선생의 인격적 힘을 소위 언행일치나 사표師表와 같은 관행적 표현으로도 대체시킬 수 없다는 논리와도 통한다.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해서 안 될 문제는 지금까지 선생에 대해서 각양각색으로 전해오는 일화의 대부분은 그 표제表題적 의미보다도 표면적 사실(fact) 쪽에 더 가까운 편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 척 단구의 촘촘한 유기체적 생명의 총체적 인격의 돌멩이로서 상징되는 선생의 생전에 남긴 궤적과 유관하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고 그 여운은 무엇보다도 고진감래와 같은 피날疲?한 결과적 명성이 아닌 그 여정 자체로서 쇄락한 행복의 힘으로 이뤄진 원형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어 더욱 불가사의하다는 점으로, 이것은 다시 현실적 비현실성이라는 역설적 의미와도 맞물려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일석 접촉권 내에 진입하기 그 이전 소년기부터 “청추수제”나 여러 장르의 글들을 통해서 선생에 대해 박꽃처럼 순박하고 담백한 정서적 친화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인연을 기대한 바도 없이 그냥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이실 거라는 그래서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그런 분으로 흠모할 수밖에 없었던바, 한남동 소재 대학원 박사과정에 설강된 선생 담당과목 수강생이 되리라고는 너무 뜻밖에 얻은 기회라고 여길 만도 했지만, 그저 충실한 자세로 수강에 임하며 일주에 한 차례 선생을 뵙고 배우는 일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학기말 “훈민정음 창제동기를 논함”이란 제목의 과제를 제출한 후 그냥 조심스러워 전전긍긍하던 중 성적처리 결과를 받아 본 순간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 있다. 그것은 당시 같이 수강하신 분들은 이른바 내로라하는 쟁쟁한 현직 교수들이고 필자만 시간 강사를 못 면한 처지였는데도 그분들의 성적보다 기록상 내 성적이 더 잘 나온 사실이기도 했지만 더 의외였던 것은 그러한 평가에 대해서 선생과 다른 그 수강자들 사이에 일점의 불편함도 감지되지 않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어렴풋이 일석이 존경받는 이유가 자신과의 친소 관계를 떠나 리포트나 출석 등을 고려해 공정하게 학사업무를 처리하는 점을 이미 모든 사람은 주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돼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 일석 이희승 선생과 함께(1980 년 신설 대전대 갈마동 가건물)
▲ 일석 이희승 선생과 함께(1980 년 신설 대전대 갈마동 가건물)

그러나 일석과 필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점점 깊은 심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세상에 이런 분도 계셨구나 싶어 그 후 필자는 선생에게서 받은 인격적인 감화 그 한 가지 기쁨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담아 단지 사실 그대로 전하려고 이 글을 쓰게 됐다는 점을 여기서 분명히 해둔다. 위의 일들은 사실 일석이 강단을 떠난 후 삼고초려 끝에 한남동 소재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계실 무렵의 얘기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필자가 흑석동 소재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가 갑자기 대전 용운동에 터를 잡아놓고 갈마동 가건물에서 학사업무를 집행하던 신설 대학에 전임으로 발령을 받은 직후의 또 다른 얘기는 성격이 좀 다르다. 대학 당국으로부터 중요한 정초작업의 하나인 교가 작사의 업무를 위임받고 나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국문학과 소속인 만큼 이는 명분상으로 당연한 업무 배당이긴 하지만 문제는 당시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반드시 일석이 작사한 가사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 업무라는 제한성에 있었다. 과연 찾아뵙고 부탁드리면 이런 지난한 일을 수락해주실 것인지에 대한 염려와 함께 …. 하지만 거듭 계기적으로 일어난 일이긴 해도 필자를 아연하게 한 것은 그 수락여부에 대한 결과 자체보다도 수락하신 후 일석께서 작사를 하기 위해 직접 설립될 대학 부지를 답사하시겠다는 의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선생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왕복 차편도 선생의 뜻에 따라 서울역 급행열차 편을 이용해 대전까지 모시고 내려갔던 바, 당시 80노구이신지라 번거로울 일들은 가급적 피해드리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신문과 방송 취재진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놓은 상태였는데도 10분 예정의 현지 도착 대면성 인사말씀을 도리어 상대를 배려하시어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편하게 해주신 연후 당일의 주 업무인 용운동 학교 부지 답사까지도 일일이 잘 챙겨 진행하시고 건강에 이상 없이 마치시는 모습에 보는 사람 모두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그뿐이 아니다 당연히 원로에 장시간 고생하신 연후인지라 편하게 모실 계획이 있었지만,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준비해 건네는 사례비도 굳이 사양하시면서 선생께서 당일 늦은 시간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의 발제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하시며 이내 상경을 서두르는 게 아니신가. 그래서 학교에서 내준 승용차 편으로 서울 재동 소재 한 학교 강당에 도착한 시간은 겨우 학회 시작 10여 분 남긴 직전이었는데도 서둘지 않으시고 운전기사에게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갈 도로 사정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시던 선생의 그 심지와 강건하심에 동행했던 필자는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러나 기술해 나가다 보니 이번 교가 작사 관련 문제 이전에 필자에게는 다소 흠결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이지만 그 내용 자체가 훌륭한 선생의 인격적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사실 필자 역시 그런 점 때문에 선생을 더욱 흠모하게 된 동기라고도 할 수 있기에 여기서 선생의 일화의 하나인 그 자초지종의 내용을 제외할 수는 없다. 본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필자가 대전 소재 대학 전임이 되기 전 만학도로서 지금 생각하면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일(당시 대학 출강 문단 현역 문학 석사로서)로 선생에게 폐를 끼친 점이라 생각이 들어 죄송한 생각이 앞선다. 충북 청주 소재 모 대학 국문과에 결원이 생겼다는 정보가 있어 고심하던 차 그 대학 원로교수와 선생과의 인맥이 닿음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선생의 아드님과 막역한 고교 선배 한 분과 필자 대학 재학 시절 은사 한 분께서 선생의 제자였기에 두 분을 모시고 선생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동숭동 자택을 방문하게 되는데 두 분과 선생과의 교분이 평소 워낙 두터웠던 지라 두 분의 보증을 담보로 거절하지 않으시고 선생께서 쾌히 추천서에 서명해주시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날 그길로 청주에 내려가 이 표현이 좀 어떨지 모르나 그 당시 터줏대감이라 알려진 지원 대학의 그 원로교수를 찾아뵙기에 이르게 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후문의 내용인즉슨 선생께서 직계 제자도 아닌 필자에게 추천서를 직접 써주신 내력을 궁금하게 여긴 그 해당 교수가 직접 상경하여 경위를 묻기에 선생께선 사실대로 말해주셨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보증을 맡았던 두 분께는 더 말할 나위 없고 선생께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그 민망함이야 무슨 말로도 대신 할 수 없었던 그 자체로만 본다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선생의 인격과 관련된 일이기에 필자에겐 오히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교훈과 시금석이 되었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집필실엔 나름 많은 사진 액자들이 걸려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 옛날 필자가 전임으로 부임하여 대전 소재 ‘ㄷ’ 대학의 갈마동 가건물에서 설립 후 첫 학사업무를 관장할 때 그 대학의 교가 작사를 위해 선생을 모시고 내려가서 선생과 함께 찍은 빛바랜 액자 속 사진 한 장은 필자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애장물의 하나다. 그리고 이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선생과의 추억 하나는 1980년대 후반 선생께서 작고하시기 2~3년 전 목 부위 피부 종양으로 고생하실 때 서대문 순화 동 ‘ㅈ’ 신문사 입구에서 필자는 오랜만에 우연히 선생을 뵙기에 이른다. 그리고 선생께서 필자를 알아보시고 하신 첫 한마디 말씀, “그때 있지,  류 교수 1984년 제 4 시집 출판 기념 겸 박사학위 수여 기념모임 때 초청을 받고도 행사가 겹쳐 참석을 못 해 미안했소.” 필자는 뵙자마자 인사를 드리면서도 못 알아보시겠지 하고 내심 겸연쩍어하고 있을 때 해주신 그 말씀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필자는 지금까지 필자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요약하여 이야기 속에 담아보려 한 데 지나지 않지만, 선생께서 세상에 오셔서 93년 동안 지상에 머무시는 동안 또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일관되게 끼쳤을 감동적 감화와 유훈에 대하여 이런 식의 시도와 관련 그 깊이와 범주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뭉뚱그려 할지 또 다른 깊은 고민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하여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다소 시사示唆한 바 있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고 또 다른 시각적 차원의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다는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부족한 대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일석 이희승 선생의 삶은 역동성 주체적 삶의 최적화最適化가 이뤄낸 우리 모두를 위한 은유적 행복의 성취라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처럼 끊임없이 이 은유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쇄락한 기쁨을 계속 송신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류근조·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중앙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시인이자 인문학자.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로 『날쌘 봄을 목격하다』, 『고운 눈썹은』 외 『지상의 시간』, 『황혼의 민낯』, 『겨울 대흥사』 등 여러 시집이 있다. 2006년 간행한 『류근조 문학전집』(Ⅰ~Ⅳ)은 시인과 학자로서 40여 년 동안 시 창작과 시론, 시인론을 일관성 있게 천착한 업적을 인정받아 하버드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의 소장 도서로 등록되기도 했다. 현재는 집필실 도심산방(都心山房)을 열어 글로벌 똘레랑스에 초점을 맞춰 시 창작과 통합적 관점에서의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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