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감성을 아쉬워하면서! - ‘안개 속에 핀 꽃’ 따이허우잉(戴厚英)의 혁명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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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감성을 아쉬워하면서! - ‘안개 속에 핀 꽃’ 따이허우잉(戴厚英)의 혁명과 사랑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05.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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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빈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

 

지나간 세월은 항상 가슴이 시리도록 아쉬운 잔영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근래에는 자본주의 화폐처럼 삭막해진 중국의 감성을 의식하면서 80년대 한중 수교만 하면 거대한 역사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며 대륙을 향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흑백영화처럼 투박한 개혁이지만 꿈만은 모호하게나마 순수하게 보였던 덩샤오핑 시대의 망탈리테를 토사구팽한 시진핑의 야심으로 인해 중국은 오늘날 ‘감성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비록 천안문 사태(89년)의 오명은 남겼으나 적어도 덩샤오핑은 개혁에 회의적이던 원로들과 부단히 대화하면서 오로지 경제개혁과 집단지도체제에 충실한 ‘인간적 사회주의자’였다. 어쩌면 그의 ‘인간적 사회주의 권력’과 민중의 ‘자유주의적 감성’의 간극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분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은 ‘21세기 발전상’은 이래야 한다는 세계인의 기대치와는 다르게 시진핑은 세계가 주목하는 순간에도 원로를 무시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고르바쵸프와 덩샤오핑보다는 진시황과 문혁시대 마오쩌둥의 감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권력과 민중의 감성 사이의 불균형마저도 사치로 여기는 무감각한 ‘대일통 중국’이 탄생하고 있다. 

80년대 공부하면서 의식하던 중국(‘중공’이라 불리던 시절)의 가난하지만, 희망으로 충만했던 그 시절의 중국의 정서를 더듬어 보기 위해 오랫동안 책꽂이 한구석에서 먼지가 낀 책을 찾아냈다.

‘중국몽’을 외치기에는 아직은 부끄러웠던 덩샤오핑 시대, 혁명과 계급투쟁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사랑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라는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사람아 아, 사람아!》(《人啊, 人!》, 1980)은 여류작가의 사랑에 관한 아름답고 슬픈 기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역자인 신영복 선생의 인생역정과도 묘한 대조의 정서를 자아낸다. 

문혁의 광풍이 몰아치던 68년 따이허우잉은 당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고 있던 ‘원지에’를 조사하게 되면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 뒤 원지에 아내의 자살, 남편으로부터의 이혼 통보를 받은 작가는 공산당으로부터 “연애라는 행위로써 혁명정신을 타락시켰다.”라는 거센 비판을 받는다. 공개적 자아비판을 하면서 굴욕을 겪은 그녀를 기다린 것은 ‘원지에’의 자살에 이은 사랑의 파탄이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들이 그녀에게 휴머니즘의 3부작 - 시인의 죽음, 사람아 아, 사람아!, 하늘의 발자국 소리 - 을 쓰게 하였다. 

주인공 ‘쑨위에’는 작가 자신을 그린 것이며 마치 《닥터 지바고》(파스테르나크, 1957)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이미지가 중첩된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쑨위에는 혁명의 시대에 정치사회적인 선택을 강제로 규율하는 권력에 대한 이념적 복종을 강요하는 시대에, 개인의 정신적인 자유를 위해 성실하게 살고자 하였던 시인인 지바고와 같은 지식인의 전형이며 또한 순수한 사랑을 형상화한 라라와 같은 이미지로도 나타나고 있다. 

초기 맑스주의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허징후에 대한 정신적인 교감과 사랑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쑨위에의 정신적 연인인 허징후는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자작 원고를 출판하려고 하나 당서기와 대학교에 근무하는 동료들의 비판과 검열에 직면하여 고독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시대의 편승자와 낙오자, 저항하는 자, 개혁의 미래를 꿈꾸는 자로 분류되는 동창생들로 이루어진 작중의 인물들과의 운명적 대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계급투쟁에서의 증오가 낳은 비인도적 현실에 대한 환멸, 그 현실을 초월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들끼리의 사랑에의 동경을 담담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계급투쟁이 생성하는 증오보다는 인간들끼리의 사랑을 더 높은 가치에 두면서 보편주의적 휴머니즘 정신을 구현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쑨위에의 사랑의 언어에는 놀랄 만큼 치밀한 사회주의적 논리와 동기가 스며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맑스주의 휴머니즘과 소외론’(《1844년 경제-철학수고》)으로 인간사랑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 “맑스는 부르주아 휴머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 사이에 하나의 선을 긋고 있지만, 휴머니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127쪽) - 나아가 작가는 - “맑스주의는 다른 사상과 경쟁하는 가운데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유일사상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31쪽) - 라고 말하면서 이념의 교조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같이 작품 여기저기에서 맑스와 마오쩌둥의 휴머니즘적이고 이상적인 측면을 인용하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작가의 성장과 교육 배경이 50~60년대 중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따이허우잉(戴厚英, 1938-1996)의 생전 모습. 출처: 바이두

따이허우잉 자신이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회체제를 가져온 공산주의혁명을 고맙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작가는 사회주의 중국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중국’을 더욱 열망하였다고도 보인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 “그들은 인간 사이의 증오는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이의 사랑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한다.”(401쪽) - 라고 외치고 있다.  

따이허우잉과 같이 특유의 감성적인 문학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박완서, 공지영 같은 여류작가들과 대조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3자는 페미니즘과 개별적 인간 주체로서의 자유의 추구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지만, 추구하는 이념적 배경은 다르다. 

박완서의 소설들에서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대부분 무정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6-25의 잔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녀의 작품들에서는 정치적 환경에 대해 이래저래 말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의지하여 문제들을 풀어나가려 한다. 마치 사춘기 시절의 우리가 엄마의 애잔한 회고담을 듣는 듯한 느낌을 그녀의 작품에서는 가질 수 있다. 반면에 공지영의 초기 소설들은 사회적 문제의식이 가져다주는 긴장감을 내내 풀 수가 없다. 운동권 대학생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적 시민이자 작가로 성장한 삶에서 보듯이 그녀의 초기 소설은 문제의식이 주는 긴장감과 도시 인텔리 여성의 감수성이 같이 배어있다. 

이에 비하면 따이허우잉은 끝까지 ‘사회주의 휴머니즘’의 논리에 철저하게 ‘의식화’(indoctrination)되어 있다. 마치 사랑을 따라서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었다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혁명으로부터 배신당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들이 문학에서 진정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치한다. 즉 누구나가 다정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받고 싶은 것,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증오로써 규율하려 하는 힘들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그녀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인 휴머니즘과 사랑의 정서에 대해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적 정서를 더욱 발전시킨 21세기에 어울리는 문화적 감수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또한 억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투박한 개혁과 모호한 희망이 공존했던 그 시대의 감성’은 더 많이 소환되는 아련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동시대 인간들 보다 한층 더 인간적이었고 사랑을 염원했던 그래서 생시에는 정치권력의 천박함을 혐오했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던 그녀는 지금 영원히 잠들어 있다. 생시에 ‘안개 속에 핀 꽃’이라 불렸던 이 여류작가에게 안개꽃 두 송이를 전하고 싶다. 한 송이는 그녀에게 그리고 다른 한 송이는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고자 했었던 - 그녀의 인간애를 이해하던, 그래서 지금은 함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싶은 – 누군가에게.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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