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주의’와 ‘지적 평등주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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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주의’와 ‘지적 평등주의’를 넘어
  • 황희숙 대진대학교·철학
  • 승인 2023.05.2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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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전문가와 전문지식의 생태학』 (황희숙 지음, 한국문화사, 304쪽, 2023.03)

 

만일에 전문가의 권위가 사라지고 누구나 그들을 대신해 나설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어떻겠는가? 더 나아가, 생명체 아닌 물질이 우리의 모든 지적 궁금증을 풀어주고 인간을 교육하는 세상이 온다면? 이런 질문은 어쩌면 아주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세상이 당도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며 개탄하거나, 파국을 우려하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다른 이는 세상의 이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흐름이라 보고, 재빨리 적응하려고 할 것이다. 

2017년 우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카페(안아키 카페)’ 사건이 있다. 이 카페에 가입한 수만 회원들 중 일부는 ‘화상 온수 요법’을 비롯해 검증되지 않은 자연치유법을 맹신하고 기존 의학과 의술 및 전문가들의 조언을 부정했다. 이 카페를 운영한 한의사가 무허가 소화제나 해독제를 판매했던 것은 식품위생법과 의료법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였다. 그런데 그 운영자가 카페의 일반 회원들을 ‘맘 닥터’로 명명하며, 정통 의학적 지식에 어긋나는 치료법 적용을 선동한 점에서 이 사건은 특히 ‘전문성(expertise)’에 대해 귀중한 시사점을 던진다. ‘엄마’와 ‘전문의’가 별 차이가 없다는 위험한 생각이 반영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블로거와 유튜버들이 비전문적인 지식을 양산하고 때로 그것을 무분별하게 전파시키고 있는 상황을 보건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잘못된 ‘지적 평등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문가의 권위를 ‘엘리트주의(elitism)’로 거부하며 전문가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일반 시민, 언론에 등장해 전문영역을 침범하는 유명인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나르는 블로거들과 크리에이터들이 전문가에 의해 독점 생산되어온 전문지식의 죽음을 선언하고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바야흐로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경외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문가들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대한 비판 또, 정보전달이나 예측의 실패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광우병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이듯이 건강, 생명, 그리고 환경 분야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문제와 그에 대한 정책 수립과 관련해, 시민들의 도전이나 비판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질병, 의료정책,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이 독단적인 믿음을 갖고 편견의 옹호자로 전락해 왔음을 지적하는 시민과 학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래서 소수의 탁월함보다 때로 다수의 결정이 더 올바르고 유익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원칙이 과학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이는 소위 ‘과학민주화운동(DSM)’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편으로 위키피디아(Wikipedia)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 일반인들도 인터넷과 SNS를 이용해 쉽게 정보교류를 하며 지식을 빨리 취득하고 전문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와 동시에 전통적 의미의 전문가와 그의 지위가 불안해진 것에는 다른 사회적 요인이 있기도 하다. 지식 자체가 너무나 빨리 변화하고,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경계 분야나 융합 분야가 출현하고 있어서 전통적인 의미의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어버린 시점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교만이나 부정직 그리고 오랜 독재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AI)에 의한 전문가의 퇴출 가능성에 대한 염려도 이 복잡한 상황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기계와 더불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강점을 증강해야 한다. 그들은 새로운 전문성을 찾고 개발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지식의 생산과 사용문제를 둘러싼 이 얽히고설킨 현재 상황은 말 그대로 ‘난장(亂場)’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전문지식이 전문가만의 표식인 시대는 지났다. 아마도 기계는 점점 더 유능해질 것이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범위와 양을 초월할 것이다. 기계가 전문가의 업무를 변혁하는 시대에는 전문가는 탈신비화될 것이며, 많은 전통적 전문직이 해체될 것이고, 사회 전체와 특정 공동체들이 (실용적인) 전문성을 공유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저자는 지식의 생산과 사용을 둘러싼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했다. 과연 이 상황이 위험한 변화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거나 오히려 바람직한 흐름일 수도 있는지, 현상에 대해 해명하고 답하며 공동체 관점에서 지식론의 모델을 제시해 보고자 했다. 

이 책은 전문지식에 대해 다루지만 전통인식론의 지식에 대한 개념분석에서 벗어나, 전문성과 전문가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는 작금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해서 다루며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비전문가인 시민들, 특히 여성들이 어떻게 전문성을 부정당해 왔고, 전문지식에의 접근이 배제되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전문가주의에 도전해왔는지, 이를 통해 젠더 과학기술 정책에는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문가에 대한 권위와 신용 부여에 대해 우리가 재고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를 위해 전문지식이 어떤 인식공동체에서 어떻게 생겨나며 사회와 문화적 환경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는 전문지식의 탄생, 확산, 전이와 소멸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 집단, 시민사회 또 정보 환경에 대해 연구하는 작업이다. 이것을 저자는 생물의 상호관계, 생물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생태학에 비유하여, ‘전문지식의 생태학(the Ecology of expertise)’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의 성취나 전문지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폄하하거나 전면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전문지식과 전문성이 정치화되고 권력으로 작용했던 사례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인지적 권위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전문가와 전문지식에 대한 일종의 생태학적 연구를 통해, 전문성의 개념을 확장하고 지식을 공동체와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로써 경직되고 편협한 형태의 전문가주의나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고자 한다. 전문성에 대한 폐쇄적 사고를 지양하고 그것을 확장해 일종의 “공동체 지식론(community knowledge thesis)”, 그리고 “유연한 전문화(flexible specialization)”라는 대안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전문성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이론적 배경과 전문지식 붕괴의 원인들을 규명하고자 하며, 전문가와 전문지식에 대한 전통적 개념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2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문지식과 전문성에 대한 생태학적 고찰을 한다.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온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의 사례와 아마추어이자 참여적 지식인들이었던 사람들의 기여에 대해 해명했다. 3부에서 전문성 확장을 주장하는 이론적 정당화를 모색한다. 여기서 “공동체 지식론”과 과학-시민 사이의 과학적 지식 생산의 공동작업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3부의 7장에서 라투르(B. Latour)가 제창한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에 의거해, 인간과 비인간과의 동맹 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행위자-연결망 속에서 전문가는 독립되고 고립된 존재일 수 없다. 과학자와 기술자는, 연결망 내의 인간-사물 행위자들을 대변하고, 이해관계를 번역하여 동맹자들을 가입시킴으로써 연결망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라투르가 말하는 ‘테크노사이언스’는 통상 우리가 말하는 기술과학과 다르다. 라투르에 의하면 그것이 군비경쟁처럼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동맹을 규합해 증명 경쟁을 벌이는 그러한 실천 활동, 문화적 활동, 문화적 장치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과학인류학적 연구는 과학자와 그의 실행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테크노사이언스의 행위자이기도 한 시민의 기여에 대해, 전문적 네트워크의 확장에 대해 우리가 다른 관점을 취해 볼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8장에서 “유연한 전문화”를 제안하기 위한 토대로 지식, 공동체, 장소(도시/지역)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논의한다. 일반 시민의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산되는지, 과학자의 ‘글로벌 지식(global knowledge)’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봄으로써 전문성의 확장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일종의 “공동체 지식론”을 구축해보려 한다. 전문지식의 생산자와 담지자는 과거의 과학자와 기술관료에 국한될 수는 없다. 일반 대중, 시민이 만들어 내는 지식도 또 다른 대안적 지식으로 여겨지고, 프로페셔널들의 지식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연결, 접합 작업을 우리는 전문지식의 ‘공동 생산(co-produc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식의 공동 생산이라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실천이고 예를 들면 국가와 대중이 생명공학과 관련해 논쟁하는 결과로 벌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음식(요리), 농업, 의술에서 발휘된 “기여적 전문성”은 이 공동생산을 예증하는 선도적 사례들이다. 이 공동생산 모델은 전문지식과 전문성의 기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문가와 일반인의 앎의 방식 사이에 확연한 구분과 단절이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맺음말에서, 전문가의 쇠락과 전문지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문가의 독단과 ‘엘리트주의’의 폐해를 벗어나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전문성을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것은 특권과 권위 아닌 오로지 지식생산을 위한 전회이자, ‘전문가’에서 ‘참여적 지식인’으로의 전향 또는 회심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궁극목표는 시대착오적이거나 위험한 전문가주의를 경계하는 것이고, “공동체 지식론”이라는 논제를 제시하는 일이다. 이 책이 제안하는 지식공동체에서는 종래의 전문가, 즉 폐쇄적 권위를 누리는 편협한 전문가 대신,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는 “참여적 지식인”이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특권과 권위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과학 지식의 공동 생산과 창조적인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므로, 저자는 이 전회를 “유연한 전문화”의 길이라고 명명한다. ‘전문성’을 폐쇄적 프레임에서 벗어나게 확대시키는 일은, 전문지식을 비전문가들 즉 인접 분야의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이 공동체에서 생산해낸 지식과 연결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숙련된 전문가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가 아닌, 전문가가 생산한 지식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독단적이고 위험한 전문가주의인 ‘엘리트주의(elitism)’를 경계하려는 목적에서다. 

시민들이 공동체의 삶에서 겪은 경험과 상식에 기반한 그리고 적절한 시험을 거친 지식 주장은, 코번(J. Corburn)이 말한 ‘거리 과학(street science)’을 이루고, 과학자의 과학과 연합할 수 있다. 전문가와 전문지식의 생태학적 고찰은 전문성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가 모두 틀린 답을 내놓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전문가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거대한 권력을 갖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전문가들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 즉 지하생활자의 세계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성공한 전문가들로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는 동창생들을 만나고 그들의 자신감과 졸렬한 사고방식을 증오한다. 특권을 가진 전문가들이 누리는 세계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수정궁(crystal palace)’이다. 이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수정궁에 혓바닥을 내미는 행위’ – 이것을 저자는 지식인들의 열정적인 ‘아마추어 정신(amateurism)’이라고 말하고 싶다. 올바로 이해된 아마추어 정신은 배타적인 전문가주의의 태도와 대조된다. 참여적 지식인들은 비록 전문가로 공인을 받기 이전에도, 선의의 아마추어 정신을 발휘해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실천행위들은 서두에서 말한 <안아키 카페> 사건 같은 현상과는 구별해야 한다. 안아키 운영자와 회원들은 기존의 의학지식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다. 반면 게이 공동체의 에이즈 환자들은 의학과 생리학을 무시하지 않았고 과학의 언어를 배워 또 다른 ‘(기여적) 전문성’을 가질 수 있었고 결국 ‘일반인 전문가(lay expert)’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시민논객들도 경제학과 사회복지 그리고 부동산 정책학, 세법 그리고 핵물리학에 대한 공부에서 출발해 논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들은 경험이 알려주는 바와, 논리와 합리성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에 충실하다. 

몇 해 전 화제가 된 부동산 카페 논객 ‘삼호어묵’의 경우를 살펴보자. ‘삼호어묵’은 평범한 주부로서 밥 짓다 눈에 띈 어묵으로 필명을 삼아 인터넷에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20편의 글이 조회 수 230만 회를 넘기자 그는 자기 글을 묶어 『정부가 집값을 안 잡는 이유』라는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아마추어 정신이 아닐까? 이들은 편협한 의미의 전문가주의와 전문가들로 이루어지는 수정궁을 거부하면서, 필요하면 혀를 내밀고 조롱함으로써 전문가를 견제하는 시민이자 지식인들이다. 이 아마추어들의 지적 놀이 또는 참여는, 전문지식이 경화되지 않게 하는 바, “유연한 전문화“의 예다. 

전문가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제인 제이콥스(J. Jacobs)나 레이첼 카슨(R. Carson)이 필요하고, 일반 시민들의 기여도 필요하다. 지식공동체 내에서 ‘일반인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들은, 전문가와 더불어 지식생산에 협업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지식 공동체를 이루는 시민들이 지역적 지식에 기반해 다른 과학 브랜드 즉 ‘거리 과학’을 만들고, 그것이 과학 전문가들의 과학과 연합하고 정책적으로 채택되는 사례들이 증가한다면, 그것은 곧 전문성이 확장되는 징표가 될 것이다. 앞으로 건강 문제와 환경 정책 등에 이해관계가 있는 일반 시민, 비전문가의 지적인 기여는 점점 늘어나리라 본다. 시간이 흐르면 지식의 공동생산 프레임은 더 확고하게 자리잡고, 비전문가의 지역적 지식도 또한 과학자의 지식과는 다른 유형의 전문지식으로, ‘시민 과학’으로 지식의 실천 현장에서 수용되게 될 것이다.

가장 전문적인 지식인 과학은 오랜 세월을 거쳐 쌓여가는 것이다. 과학은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해 왔고 그 과학지식을 이해하는 방식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변화해 갈 수 있다. 어떤 좁은 분야의 과학자와 전문가가 진리를 모두 알고 있을 수는 없다. 과학지식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인류에게 닥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오직 과학자만 수고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보기에 전문성의 개념은 두 개의 협곡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다. 전문가주의와 지적 평등주의라는 협곡이 그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유연한 전문화’와 ‘참여적 지식인’의 개념을 제안하고자 했다. 과학자와 일반 시민,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은 공공 공간에서 서로 목소리를 내고 경청하며, 서로의 선의를 의심하며 비방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도전을 계속하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  


황희숙 대진대학교·철학

대진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은유, 회의론, 인지주의 감정론, 토착 지식, 생태론, 공동선, 공감 등의 주제로 논문을 써왔다. 저서 『비트겐슈타인, 두 번 숨다』, 공저 『여성과 철학』가 있고,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에코테크네 페미니즘』, 『장소 철학 1, 2』가 있고, 역서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젊은 과학의 전선』, 공역서 『이것이 생물학이다』, 『현대 자연주의 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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