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고문자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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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고문자의 흐름
  • 이승훈 서울시립대·중어중문학
  • 승인 2023.05.21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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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한자의 풍경: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사계절, 520쪽, 2023.04)

 

이 책은 중국 고대사의 시간을 따라 한자가 처음 발생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풍경처럼 보여준다. 풍경이란 창문이나 사진기의 렌즈처럼 특정한 프레임을 통해 보여지는 자연의 일부를 말한다. 우리는 작은 부분만으로도 큰 세계를 유추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창밖의 풍경만으로 그날의 날씨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몇 개의 글자들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모습이 풍경처럼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여 년 전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까지 明자는 해(日)와 달(月)이 함께 있어 밝은 것이라고 풀이되었다. 하지만 갑골문을 보면 옛글자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상상력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갑골문 明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조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어두운 밤 창문에 비치는 달처럼 밝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처음 글자를 만든 사람들에게 밝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선명한 풍경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달을 나타내는 月자는 약간 찌그러진 초승달 모양이다. 달의 모습을 생각해보라고 하면 우리는 아마도 대부분 동그란 원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원이나 반원은 한 달에 딱 두 번만 나타난다. 하지만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찌그러진 모습은 거의 한달 내내 볼 수 있다. 달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에 글자를 만든 사람들은 달이 완벽한 구체라는 과학적 사실보다는 찌그러지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매일같이 세상을 비춰주는 모습 자체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처럼 月자와 明자와 같은 글자가 보여주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글자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사물의 특징을 잡아내고 생동감 있는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 고민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몇 개의 풍경만으로는 그 시대의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차와 자동차 같은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쳐가는 풍경 속에 희미해진 윤곽과 색채에 주목했던 어떤 사람은 인상파라는 새로운 회화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이 재현해 놓은 뭉개진 풍경을 실물이나 사진과 비교하면서 사실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본 독특한 풍경을 또 하나의 예술적 창조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한자의 풍경들도 중국고대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문자학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놓은 훌륭한 연구 성과들을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쉬운 평이한 언어로 풀어 쓴 것이다. 한자의 역사에 관심은 있지만 학술적 장벽 때문에 부담을 느꼈던 일반 독자라면 편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학술 논문들이 주로 특정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데 주력했다면, 이 책은 학술적인 논의의 부담에서 벗어나 좀 더 편하게 주변 학문의 다양한 담론들을 엮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한자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들도 다양한 지적 탐험을 따라가는 데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이라는 시간과 공간에 한자를 묶어두지 않았다. 최근 미술사의 논쟁, 물질에 대한 자연과학적 정보, 최신의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활용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한자를 바라본 것이다. 예를 들면, 한자에는 곡선이 거의 없고 주로 직선으로만 구성되는 이유를, 형태의 본질을 직선에서 찾으려는 몬드리안의 주장이나 뇌과학의 문자상자의 이론에서 단서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림문자에서 시작했던 한자의 유전자에는 현대 회화의 거장들이 던진 근본적인 화두가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뇌과학에서 제시한 문자상자 이론은 한자를 비롯한 인류문명의 고대문자가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한  물질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지식들은 고대 한자가 새겨졌던 뼈와 돌 그리고 청동기라는 특수한 재료로 인해 한자의 형태와 특성이 정해지는 과정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고대한자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가 의외의 지점에서 풀릴 수 있는 것이다. 

고대한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갑골문에는 인간의 미세한 감정이나 복합적인 사유와  관련된 기본적인 글자들이 많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갑골문을 주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상나라의 왕이나 주술사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지했던 그들은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갑골문 이후에 나타난 금문에서도 마음 心 자로 구성된 글자는 약 20여 자에 불과하다. 이처럼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초기 한자에서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관한 글자를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갑골문 시대에서 1000년이 지난 한나라 때 편찬된 한자 사전 『설문해자』에서는 心 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가 263자로 늘어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이성이 예리해지고 감정이 풍부해짐에 따라 글자들이 계속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까지 신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갑골문에서 시작된 한자의 역사에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변화해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대한자라는 창을 통해 우리는 글자를 만든 사람들의 기발한 창의력과 무한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자는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글자가 대응하는 표의기호에서 출발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무한정 글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글자가 만들어진 뒤에는 기존 글자로 다양한 의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원래 갑골문에서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였던 卽(즉) 자는  ‘곧 어떤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미래시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편 밥을 다 먹고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旣(기) 자는 ‘이미 어떤 것이 완료되었다’는 문법소로만 사용된다. 밥그릇과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이 글자들은 원래 밥 먹는 현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냈지만, 나중에는 각각 미래와 완료를 나타내는 추상적 의미로 멋지게 변신한 것이다. 

아름다울 麗자의 갑골문은 사슴의 두 뿔을 형상한 것이다. 사슴의 두 뿔은 똑같이 생기지는 않지만 멀리서 보면 서로 균형을 이루며 절묘하게 대칭을 이룬다. 대칭은 중국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미학적 장치이다. 이렇게 멋진 글자가 획수가 많아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현대 중국어 간체자에서는 ‘丽’자로 간략화 되었는데, 사슴의 두 뿔만 남긴 것이다. 세월이 돌고 돌아 다시 글자의 기원을 찾아간 것이다. 이처럼 麗라는 한 글자에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형태에서 찾아낸 원시 한자 발명자의 창의적인 상상력이 그대로 담겨있으며, 동시에 한자의 발전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생생한 형태를 보존하려는 예술성과 획수를 간소화하려는 실용성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몇 가지 풍경을 통해 독자들은 고대한자가 만들어진 시대의 모습을 좀 더 종합적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글자를 만든 옛사람들의 뛰어난 창의력과 상상력을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으며, 최신의 과학적 방법론으로 옛글자의 구성 원리를 설명해내는 지적인 쾌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훈 서울시립대·중어중문학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수사학 전공을 바탕으로 중국의 문자, 고전, 문화사 등 전방위 분야를 탐사하며 옛 글과 문자에 담긴 깊은 사유를 현대와 잇닿게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일반지식은 물론 전문 자료를 모은 개방형 디지털 아카이브 중국학 위키백과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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