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항해하는 호모 마키나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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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항해하는 호모 마키나를 위한 안내서
  • 배문정 우석대·인지과학
  • 승인 2023.05.21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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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인지과학의 기원 또는 사이버네틱스』 (장피에르 뒤피 지음, 배문정 옮김·해설, 지식공작소, 632쪽, 2023.03)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인지과학의 기원 또는 사이버네틱스.” 이 책은 쟝피에르 뒤피가 1994년에 프랑스에서 출간한 “Aux origines des sciences cognitives(인지과학의 기원에 대하여)”에 기원을 두고 있다. 번역서니 원저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으나, 굳이 기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책이 2000년과 2009년에 영어판으로, 그리고 2023년 한국어판으로 출간되면서 분량과 형식에서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On the origins of cognitive science: the mechanization of the mind(인지과학의 기원에 대하여: 마음의 기계화)”라는 제목으로 2000년에 출간된 영어판은 프랑스판의 대대적인 증보판이고, 2009년의 개정판에는 합성생물학과 유전공학으로 본격화된 ‘생명과 인간의 기계화’를 다루는 긴 서문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거의 15년이 지나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과 함께 상당한 분량의 해설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개정판이 출간될 때마다 분량이 늘어나는 이유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 등의 현대 과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그 속도만큼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숙고하는 일이 다급하고 절실한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사이버네틱스의 초기 역사를 다룬다. 역자가 판단하기에 이 책은 지금까지 출간된 어떤 책보다도 사이버네틱스의 과학과 철학의 지형을 깊이 있게 탐색한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 마음먹은 이유다. 사실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는 1950년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비록 그 위세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네틱스 실험이 진행되었고, 다양한 사이버네틱스 변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또한 만만치 않게 중요한 역사다. 해서 사이버네틱스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20세기 이후의 인류가 겪고 있는 문화적 대 격변은 그 다양한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와 실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래서 사이버네틱스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이 책은 사이버네틱스의 전 역사를 추적하고 21세기 문명의 방향타를 찾는 더 긴 여정의 출발선으로 기획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이름은 “21세기를 항해하는 호모 마키나를 위한 안내서”다. 

이 책과 이어서 출간될 일련의 사이버네틱스 연구서들이 21세기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20세기 소년, 소녀들에게 진실로 나침반과 방향타가 되어줄지는 사실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폭 이후 인류에 의한 인류의 멸종이 그저 공상이 아니고, 코비드 19 이후 인류세 대멸종의 경고가 허황한 묵시록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에 인공지능과 인공두뇌, 인공생명의 기획이 인류 문명에 가져올 위험과 약속, 그리고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아마 점점 낯설어지는 21세기를 버티고 살아내는 우리 모두의 숨겨진 불안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처방을 찾는 여정은 분명 고되고 막막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역자는 내일 멸망할 지구에 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는 심정으로 책의 작업을 진행했다. 할 수 있는 게 그 일밖에 없으면, 그 일부터 하는 것이 맞다. 

                                                        1953년 메이시회의 종료 기념 사진

이 책이 다루는 사이버네틱스의 ‘메이시 시절’은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사이버네틱스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대공미사일과 컴퓨터의 발명을 추진한 공학 프로젝트가 아니라, 근대 과학의 조악한 기계론을 극복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과학의 영토로 가져온 새로운 과학이었다. 이러한 사이버네틱스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이 책이 다루는 메이시 시절이다. 비록 뒤피는 ‘마음의 기계화’ 즉 인지과학과의 관련 속에서만 사이버네틱스의 기획을 검토하고 있지만, 사실 사이버네틱스는 마음뿐 아니라 생명과 사회, 지구 생태계를 포함하는 모든 살아있는 체계를 설명할 보편과학으로 출범했다. 

사이버네틱스는 사이버 공간, 사이버 범죄, 사이보그 등 ‘사이버’라는 형용사로 일상에서 매우 친숙하게 소비되고, 식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이버네틱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간에서 소비되고 있는 사이버네틱스의 이미지는 실제의 사이버네틱스와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이버네틱스는 오랫동안 파문과 추방, 유목의 신화 속에 봉인된 채, 오랫동안 학계의 금기어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절대로 사이버네틱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이런 사정은 사이버네틱스의 유산을 가장 풍부하게 물려받은 인지과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쟝피에르 뒤피가 사이버네틱스의 초기 역사를 추적하는 이 책에 ‘인지과학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이고, 사이버네틱스 자체의 역사뿐 아니라 인지과학과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역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인지과학자들의 태도에 격분했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과학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 인공지능학자 마빈 민스키는 사실 ‘사이버네틱스의 어머니’이자 신경망의 창시자인 워렌 매컬러가 정성을 다해 돌본 제자였다. 

사이버네틱스의 유산을 고의로 숨기고 언급하지 않는 학자들이 비단 인지과학자들만은 아니다. 복잡계과학을 비롯해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적, 개념적 세례를 받은 대부분의 현대 과학은 자신의 역사에서 사이버네틱스의 이름을 생략한다. 정보이론과 공학은 사이버네틱스 대신 섀넌 개인의 이름만을 명시하고, 복잡계 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 대신 폰 노이만을 언급한다. 또 알파고를 탄생시킨 인지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는 고사하고 신경망의 창시자인 매컬러와 피츠의 이름까지도 생략한다. 사이버네틱스의 공학적 기여가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한 분야에서도 사정이 이럴지니, 사이버네틱스에 그 명칭을 부여하고, 철학적,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위너의 이름이 조롱과 희화화의 소재로만 언급되는 건 어쩌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초기 사이버네틱스의 주요 인물들
                                               초기 사이버네틱스의 주요 인물들

이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면서 역자는 사이버네틱스의 이론과 수학, 더 중요하게는 그 철학과 태도에 깊이 매료되었다. 사이버네틱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사이버네틱스는 기계의 과학이며, 동시에 생명의 과학이고, 수학이며 동시에 철학이다. 딱히 그 범위와 한계를 특정하기 힘든 이 학문에는 패러다임이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 사이버네틱스의 면모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증가하면서, 역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은 ‘사이버네틱스의 실패’였다. 사이버네틱스는 진실로 실패했는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나? ... 

책의 번역과 해설을 다 마감한 지금, 역자의 대답은 사이버네틱스는 실패했으나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동안 사이버네틱스라는 명칭은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볼드모트 신세였지만, 사이버네틱스의 수학과 공학은 명실상부 21세기를 점령했다. 알파고와 챗GPT, 데이터 과학과 베이즈주의 통계학, 로봇공학과 생체공학, 복잡계과학과 자기조직화이론까지 21세기 과학은 사이버네틱스의 수학과 공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다. 사이버네틱스의 상상력과 철학이 21세기 문화 전반과 예술에 미친 영향 또한 가늠하기 힘들다. 컴퓨터혁명에서 정보혁명, 인터넷혁명, ... 다가올 로봇혁명과 두뇌혁명까지 혁명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표현하기 힘든 21세기 문명의 급변은 모두 사이버네틱스로부터 발원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탁월한 사이버네틱스의 역사가 군사과학이라는 왜곡과 폄하, 공상과학이라는 조롱과 신화 속에 봉인되어 그처럼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냉전 시기의 여러 정치 역학이 작용했고, 사이버네티션들의 우발적이고 불행한 개인사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사이버네틱스가 가졌던 포부와 전망이 후대 과학자들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크고 원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예로 인지과학자들이 사이버네틱스를 우회하고 그 혈통을 지워버린 가장 큰 이유는 ‘사이버네틱스의 마음’이 뇌를 경유하지 않고는 제작할 수 없는 ‘물질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민스키가 스승과 함께 추진하던 신경망 연구를 포기하고, 기호와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의 마음’으로 연구를 선회한 이유는 그 길이 더 빠르고 더 유망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유망해 보였던 ‘기호의 인공지능’은 ‘신경의 인공지능’에 일찌감치 자리를 내어주었다. 마찬가지로 정보공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공학이라는 허망한 사이버네틱스 이상을 버리고, 전신 통신 기술에 자신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보이론은 생명체에서 두뇌, 사회과학, 심지어 물리학까지 모든 학문의 공용어가 되었고, 정보이론은 더이상 디지털 코드로서의 정보에 자신을 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사이버네틱스가 예견한 과학의 미래는 그리 요원한 것이 아니었고, 그 포부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한 가운데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는 사이버네틱스가 예견한 과학의 성취 앞에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는 1963년에 쓴 “신과 골렘 주식회사(God & Golem Inc.)”에서 사이버네틱스의 기술이 학습하는 기계와 자기재생산하는 기계의 출현으로 이어질 구체적인 방법을 기술하고, 사이버네틱스 기술이 약속하는 마법의 기계와 불사의 신체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라는 경고를 던졌다. 마지막 저작이 된 이 책에서 그는 기계와 인간의 결합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을 때, 진실로 필요한 일이 수고로운 모든 일을 기계에게 맡기고 인간은 스스로 무력한 불사의 존재가 되는 일인지를 묻는다. 위너에 따르면, 그때 인간의 할 일은 더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인간적인 인간은 깊은 윤리적 숙고와 단련을 통해서만 탄생한다. 

위너는 사이버네티션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실제 뒤피의 책에서도 위너는 절충주의자로 폄하된다. 그는 사이버네틱스를 그 한계까지 발전시키는 일에 열정을 다한 만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사이버네틱스의 수학과 과학을 정초하는 동시에 사이버네틱스의 위험을 경고하는 자신의 심정을 환자의 몸에 칼을 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는 의사에 비유했다. 위너의 경고대로 사이버네틱스의 기술은 확실히 위험한 폭력이다. 인공지능을 넘어 인공두뇌, 인공신체로 이어지는 사이버네틱스 기획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조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동물과 인간을 대상으로 조용하고 가열차게 진행하고 있는 인공생물 프로젝트는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자연선택과 진화의 과정을 완전히 제거할 경지에 다다랐다.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책이 답을 찾는 독자들의 여정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길 희망한다. 


배문정 우석대·인지과학

우석대학교 교수. 인지과학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후 대학원에서 인지심리학을 전공했다. 예일대학교와 코네티컷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고, 이때 생태주의 심리학자 마이클 터비를 만나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얻었다. 학자로서 소임은 과학에 윤리와 책임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초기 사이버네틱스의 유산, 특히 위너의 윤리적 비전과 깁슨의 생태주의 심리학, 바렐라의 실행주의 인지과학을 결합하고 발전시켜, 21세기 문명을 헤쳐 나갈 나침반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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