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진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상태바
과학의 진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5.20 02: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 | 존 에이거 지음 | 김동광·김명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848쪽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 자신의 호기심과 의욕에만 달려 있지 않다. 전쟁과 행정, 시장(혹은 거대 기업)의 요청이라는 현실, 즉 ‘실행세계(working world)’가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며, 나아가 발명과 발견까지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진행해나간다. 골방 속 과학자 역시 현실 속에서는 기업이나 연구소의 연구원, 교수를 거쳐 강력한 자기 홍보와 후원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자-기업가로 대체된 지 오래다. 과학자는 홀로 연구하지 않는다. 과학자는 과학자 공동체(scientific community) 속에서 활동하며, 후원과 성과를 놓고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학제를 넘어 협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한 과학자 공동체 역시 20세기 과학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점차 과학사 연구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20세기 과학사’의 기존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덧붙인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저자가 책 전체의 기본 틀로 제시하고 있는 ‘실행세계’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과학사에서 오래전부터 쓰여온 ‘맥락(context)’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진부해져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대신해 ‘실행세계’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한다. 이러한 성격 규정을 통해, 책은 양자물리학에서 생명공학 혁명에 이르는 지난 100여 년간의 과학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다.

책은 20세기 과학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사건’을 다룬다. 사건들은 서로 연속적이며, 서로 교차하다 끝내 만나고 마는 두 개의 흐름으로 서술된다. 하나는 응용세계, 즉 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실행세계다. 실행세계가 응용세계를 추동하며, 그렇게 생긴 흐름은 새로운 실행세계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아는 역사가 연속적이듯 실행세계 역시 그러하며, 응용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전투기와 미사일의 개발은 레이더의 발명을 거쳐 사이버네틱스의 창안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발전을 불러온다. 발달한 네트워크는 인공지능의 초석이 되며, 동시에 유전체 지도의 해석을 거쳐 생명의 재설계와 외계 생명체 탐사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렇듯 우리 눈을 홀리며 명멸하는 과학사의 불빛들 뒤에는 이 불빛을 이루어낸 우리 시대의 실행세계가 있다. 제국주의로 인한 국가적 관리와 기업의 대두를 거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 뒤를 이은 과학을 통한 냉전 시기 체제 경쟁으로까지 이어져, 다시 재차 합병으로 더욱 강력해진 거대기업의 주도하에 과학과 과학자의 모습 모두를 변화시킨 우리 시대의 실행세계 말이다.

현실의 요구(실행세계)가 지난 100년 동안 과학(응용세계)을 진보시켰다. 이때 현실의 요구는 근대 국가의 특성이기도 한 운송과 통신, 전력과 농업이기도 했고, 전쟁과 냉전을 배경으로 한 군사력의 준비, 유지, 동원이거나 신무기이기도 했다. 국가의 행정이거나, 인간의 건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거대 기업으로 대표되는 상업의 요청이기도 했다. 때로 이런 요구는 식민지 시대의 착취나 군비 경쟁, 환경과 인권, 국가 권력이나 기업의 횡포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에 강력히 반대하는 노동, 반핵, 환경운동과 페미니즘조차 행동의 근거를 과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서술하는 과학사는 시대를 따라 변화하는 권력에 때로는 유착하고, 때로는 맞서며, 성공하기도 혹은 실패하기도 했던 과학자, 아니 과학자 공동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스탈린 집권 시기, 소련은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그들만의 과학을 발전시켰다. 나치 집권하에 망명하지 않은 물리학자 일부는 이른바 ‘아리아 물리학’이라는, 유대인(과 그들의 성과)을 배제한 독특한 물리학을 만들어냈다. ‘국가’라는 실행세계에 의한 이러한 과학은 인간의 삶, 그리고 과학에 약간의 긍정적인 결과와 그보다 많은 치명적인 해악을 만들어냈다. 책은 그 외에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점점 더 커져가는 ‘국가에 의한 과학의 동원’을 이른바 ‘실행세계’ 관점에서 꼼꼼히 분석하며 다루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는 냉전 종식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기밀해제된 사료들에 입각해 이뤄진 새로운 과학사 연구의 성과를 적극 반영한 성과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의 군사적 요구는 이를 수용하든 거부하든 간에 동시대 과학자의 정신상태와 연구 활동을 규정지은 환경이었고, 이 시기에 이뤄진 다양한 분야의 과학 활동에 독특한 각인을 남겼다. 냉전이 과학에 남긴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이 시기를 다룬 과학사 연구가 쏟아져나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냉전 시기 과학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세기는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였다. 물리학과 유전학은 20세기 초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멘델의 ‘재발견’을 거치며 근본적인 개념적 혁명을 겪었고, 분자생물학과 지구과학은 20세기 중반에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과 판구조론 정립을 계기로 현대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때 생겨난 이론과 실천들이 오늘날까지 해당 분야의 과학 교육과 연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며 과학의 ‘쓸모’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9세기 말의 ‘제2차 산업혁명’ 시기에 출현한 과학기반 산업 분야들은 과학 연구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체 연구소를 설립해 과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각국 정부들은 과학자들을 동원해 군사 연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어진 냉전 시기에 그러한 경향은 더욱 커졌다. 그런 연구개발의 성과들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이를 본격적으로 바꿔놓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동시에 과학자 그 자체의 성격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이어졌다. 과학자라는 단어가 생겨난 이래, 특히 지난 100여 년간 이들은 현실세계에 상주한 가장 유력한 고객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조차 상품으로 내다파는 과학자-기업가, 때로는 이러한 구조에 도전하는 도도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