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언제나 요동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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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언제나 요동치고 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5.20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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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치는 가족: 가족법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의 상상력 | 이행미 지음 | 파이돈 | 312쪽

 

한국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가족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의를 넘어 기존 가족 관념을 해체하고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가족은 모든 위기와 풍파 속에서도 지켜져야 할 공동체를 상징하는 신화화된 집단이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은 가족이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권리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에야 발견되는 급진적인 사유일까. 이 책은 오늘날의 이러한 고민이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넘는 근대 초기 한국 사회에서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근대 초기에도,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에도, 그리고 202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도 가족은 언제나 요동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식민지시기 발표된 50편 가량의 문학작품을 분석하고, 신문과 잡지에 실린 논설이나 기사 등 당대 담론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국가가 법을 통해 규정한 ‘정상가족’과 변별되는 새로운 가족‘들’을 상상해나갔던 장면을 섬세하게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식민지시기 가족법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까지 나간다. 근대문학에 나타난 가족을 가족법을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은 가족의 본질과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개인의 권리와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집단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심문하는 작업이다.

근대 가족법은 가족의 범위와 구성원의 권리를 성문화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법의 테두리에 속하지 않아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근대문학은 법을 매개로 개인 또는 가족이 정상/비정상으로 구분되는 현실을 문제적으로 형상화한다.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며 위험한 존재로 이야기된 이들은 문학 속에서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불온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부부재산의 공동 소유 및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 인정 문제, 간통죄의 젠더불평등한 요인, 이혼할 권리뿐 아니라 이혼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에게 불합리한 조건 등에 대한 내용은 가족법 개정 운동의 쟁점일 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들이다.

식민지시기 소설은 당대 법 현실로부터 발생한 사회 문제를 다각도로 포착하고 비판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대안적 상상력을 펼쳐나간다. 계약 개념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나혜석, 혈연이나 제도가 아닌 사랑이라는 가치로 구성된 가족을 꿈꾼 김명순, 부계혈통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호적에 등재되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태준과 최정희, 그 밖의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혈통이나 제도가 아닌 ‘개인’의 신념과 가치에 따른 선택을 중시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소유권에 바탕을 둔 근대적 법률이 이상적 가족을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 혈연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구성되는 가족의 형상화, 법적 등록 바깥에 있는 대안적 공동체를 그리거나 국가가 배제한 이들을 민적에 올려 다른 방식의 가족을 구상하려는 시도 등이 나타난다.

근대 가족법의 탄생 속에서 나타난 큰 변화 중의 하나는 결혼과 이혼의 문제였다. 이러한 변화는 조혼과 정략혼 속에서 고통받던 모든 이들에게 해방의 순간으로 다가왔지만, 특히 여성의 인권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첨예하게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대 여성은 근대법의 해방과 구속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근대법은 여성을 결혼계약의 주체로 호명하였지만, 젠더불평등한 법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강화했다. 근대문학은 근대와 전통 어디에서도 행복한 삶과 진정한 자유를 찾지 못하는 여성들의 내면적 동요와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고투를 그려낸다. 

문학은 제도로 수렴되지 않는 당대 사람들의 욕망과 비판적 감수성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이다. 근대 가족법의 도입으로 인해 변화된 현실을 제도와 정책의 차원이 아닌 문학을 통해 읽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근대 가족법은 당대 가족 현실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었지만, 가족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힘은 아니었다. 여전히 전통가족 규범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문명화라는 과제를 위해 여러 사상과 담론들이 수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족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여러 규범이 난무하는 현실을 살아갔다. 일상은 규범에 대한 복종과 저항, 매끄러운 이해와 오해, 해방의 감격과 불평등의 감각,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균열의 틈이 만들어지는 현장이다. 문학은 이러한 일상의 미시적 순간들,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을 폭넓게 담아낸다. 이러한 틈을 포착하는 문학은 제도와 담론으로는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소수자의 인권과 정의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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