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세계의 어둠을 어떻게 밝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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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세계의 어둠을 어떻게 밝히는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5.2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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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의 바깥으로 | 나희덕 지음 | 창비 | 280쪽

 

이 책은 나희덕 시인의 시론집으로 1989년 등단 이래 쉼 없이 추구해온 생명·생태·환경 등의 시적 주제가 유려하고도 날카로운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끝까지 시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계의 어둠을 밝히며 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지평에 대해 꼿꼿하게 써내려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시 읽기가 가치 있으며 또한 즐거운 일임을 깨달을 수 있다.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부는,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과 이로 인한 생태위기의 현실에서 시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글 모음이다. 자본세(Capitalocene)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지금’을 사는 시인들은 어떤 의식을 바탕으로 저항하고 있는지를 톺아보는 작업이 특히 인상적으로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를 통해 이를 살펴보았다. 강성은, 이장욱, 이근화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추적해본 것도 유의미한데 최근 발표되는 ‘반려동물 시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지금, 저자 스스로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몸과 마음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지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제2부는 작가론들이다. 나희덕의 문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현종 김종철 강은교부터 신예인 조온윤 박규현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한 시인에 대한 글이 모였다. 분석에 치중하는 여느 작가론과는 달리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담담한 사념이 풍성하게 포함되어 있어 마치 각각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문체가 편안함을 준다. 세상을 떠난 기형도, 박영근, 최영숙에 대한 글은 특히 독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제3부는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에 대한 글로 학술적으로도 유의미하며 한국 현대시의 밑바탕을 크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탁월한 글들로 꾸려졌다. 특히 김종삼의 「라산스카」 시편에 대한 비평문은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데, ‘라산스카’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폭넓은 문화적 지식을 동원해 추적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백낙청과 김현이 각각 엮은이로 참여한 김수영의 두 선집을 비교분석하는 글 또한 한국시 독자라면 스쳐갈 수 없는 대목인데 엮은이의 문학적 성향이 선집을 어떻게 다채롭게 꾸려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시인을 더욱 다채롭게 조망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나희덕의 문학을 직립하게 하는 세 개의 중력으로 ‘역사적 인간을 적는 백낙청’ ‘생태적 인간을 적는 김종철’ ‘상상력의 인간을 적는 정현종’을 들며, 이들이 나희덕이라는 촉매를 통해 『문명의 바깥으로』에 조화롭게 용해되어 있다고 했다. 나희덕 스스로 “한국 현대시의 한 중력”(추천사)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번 시론집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이 덕분이다.

저자는 본인의 글이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책머리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론집을 펴낸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일견 무용해 보이는 시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수 있다는, 또한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약일 수 있다는 저자의 신념에 기반한다. 그 강인한 마음이 오롯하게 문장으로 모인 『문명의 바깥으로』. 이 목소리에 시를 사랑하는 독자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시’라는 유효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은은하게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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