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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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 대한 단상
  • 김범수 편집기획위원/서울대·정치학
  • 승인 2023.05.1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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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칼럼]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었던 학회 활동이 올해 들어 다시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필자의 경우 가입한 학회가 여럿이다 보니 최근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학회 주최 학술회의 안내 메일을 받고 있다. 실제로 올해 1학기에만 정치학 관련 분야에서 어림잡아 십여 개의 학회가 이십여 차례 이상 학술회의를 개최했거나 개최할 예정이다. 바야흐로 학회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이처럼 학회 활동이 다시 살아나고 있지만, 학술회의에 참석해 보면 학회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 또한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학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과거와 비교해 확연히 줄어들었다. 우리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학회가 개최한 학술회의에서조차 몇몇 패널의 경우 청중 한두 명과 발표자, 토론자만 자리를 지키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이뿐만 아니라 발표자와 토론자의 면면도 매번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경우가 너무 많다. 물론 특정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폭이 좁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때도 있지만, 학술회의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몇몇 학자들이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식상해져서 외면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마도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회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20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공 분야의 메이저 학회 발표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학회가 주최하는 정례 학술회의에서 자신의 박사논문을 주제로 발표하고 선후배 학자들로부터 여러 코멘트를 듣고 식사 자리에서 술 한잔하며 인사하는 것이 일종의 학계 데뷔처럼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학회는 학자들의 등용문이자 학문공동체의 플랫폼 역할을 주도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제 학계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변하다 보니 학회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특히 대학교 교원 신규 채용과 승진, 정년보장 임용에서 영어 논문의 중요성이 절대적이 되면서 국내 학회가 점점 더 외면 받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정치학계만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최근 학위를 마친 젊은 학자들에게 들어보면 학회에 나가 사람들 만나고 교류할 시간에 영어 논문 한자라도 더 쓰는 것이 취업에 유리한 상황에서 누가 학회에 나가겠냐고 이야기한다. 또한 대학의 조교수, 부교수로 자리 잡은 학자들 또한 대학본부가 요구하는 승진 기준과 정년보장 기준을 맞추기 위해 영어 논문 쓰기 바쁜 상황에서 학회에 나가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더해 영상 매체를 통한 지식 콘텐츠의 ‘범람’ 또한 학회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유명 학자의 발표나 강연을 듣기 위해 학회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이제는 집에서 컴퓨터에 접속하거나 TV를 틀기만 하면 전 세계 유명 학자의 발표와 강연을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시간을 들여 오프라인 학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어졌다. 실례로 TED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전 세계 유명 학자들의 강의가 넘쳐나고 있고, EBS에서 방송하는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에서는 ‘이런 분이 한국 TV에 나오다니’ 하고 놀랄 정도로 유명한 분들이 강연하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유튜브(YouTube)를 비롯한 온라인 영상 플랫폼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새로운 학술 콘텐츠가 업로드되고 있다. 이제 학술 교류 활동의 중심이 오프라인 학회에서 온라인 영상 플랫폼으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이처럼 학계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정치학계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회 활동을 보면 아직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상당수 인문사회 분야 학회에서 회장과 주요 임원들이 인맥과 학연을 총동원해 연구 용역과 과제를 수주해 오면 상대적으로 연배가 어린 신진 학자들이 보고서 작성에 매달리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예산으로 ‘행사를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관행이 수십 년째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고정 수입이 없는 학회의 운영 예산 확보를 위해 일정 정도의 용역 수행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제 ‘용역을 위한 용역’, ‘행사를 위한 행사’는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용역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용역을 수행하고, 젊은 학자들의 취직과 승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용역을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와 더불어 학회가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 사회와 소통하고 지식 나눔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영상 플랫폼 활용에 적극 나서야 할 것 같다. 최근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제작한 영상임에도 조회 수가 수백만이 넘는 지식 콘텐츠가 무수히 많다. 학회가 주도적으로 나서 이러한 지식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다면 학계의 외연을 확대하고, 우리 사회의 공론장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 종료 이후 모처럼 만에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학회들이 적극적인 변화를 통해 학문공동체의 중심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범수 편집기획위원/서울대 자유전공학부·정치학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현재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학부장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한 나를 지켜줄 7가지 정의론』, 『평화학이란 무엇인가: 계보와 쟁점』(공저), 『한일관계 갈등을 넘어 화해로』(공저), 『인권의 정치사상: 현대 인권 담론의 쟁점과 전망』(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정의, 인권, 평화, 민족주의 등 현대정치이론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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