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불교, 도교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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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불교, 도교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5.1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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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사유의 충돌과 융합: 동아시아를 만든 세 가지 생각』 (최광식 지음, 21세기북스, 288쪽, 2023.04)
    
 

지금 세계가 앓고 있는 문명의 갈등은 극심한 종교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다원주의적 종교문화는 오늘날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불·선 융화의 전통이 종교 사이에 소통과 화합을 통한 공존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다원주의적 종교문화는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다양하게 수용하였던 동아시아 세계관에서 기원하였다. 1세기부터 8세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유·불·선의 종교의식이 충돌하고 융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의식은 7세기 이후 중국으로부터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세계에 편입되면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대립과 화합의 과정은 1세기부터 8세기를 다루는 각 국가의 고전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오긍이 지은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으로, 유·불·선이 갈등하고 융화하며 만들어진 동아시아 통치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 시기는 한자의 사용과 유학의 진흥, 율령의 반포와 불교의 발전 등을 통하여 당나라와 통일신라 및 일본이 동아시아 세계를 형성하고 보편적 세계관을 확립하던 시기였다. 『정관정요』는 이 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나라의 황제뿐만 아니라 통일신라나 일본 왕들의 통치 지침서로도 기능하였으며, 신하들 역시 이를 귀감으로 삼아 정치를 행하였다. 

중국은 기원전 3세기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었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한나라가 들어섰다. 이후 400여 년간 전한과 후한은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기반을 만들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세기에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를 두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를 국교화했으며, 이후 1세기부터 8세기까지 유학은 중국을 통치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도, 당나라 시대에는 국교를 도교로 삼는 등 복합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편 불교는 기원후 1세기에 서역을 통하여 한나라에 전해졌는데, 대승과 소승의 경전들이 번역되어 불교의 이해를 넓혔다. 이후 5세기에는 구마라습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와서 대승경전을 번역하면서 교리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남북조시대, 특히 북조의 왕들이 부처와 왕을 동일시하는 ‘왕즉불’ 사상을 내세우며 후원하여 더욱 발전을 이룬다. 비록 시대를 거쳐 오며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나, 불교의 영향력은 8세기까지 지속되며,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충돌과 융합의 양상은 이어졌다. 

한편 삼국의 경우, 유교는 낙랑군을 통하여 전래되었는데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태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가르쳤으며, 백제는 오경박사를 두었고, 신라의 화랑도에는 유교적 이념이 포함되었다. 불교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4세기 말 전래 수용되어 순조롭게 공인이 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에 전래 수용되었으나 공인은 6세기 초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다. 나아가 삼국은 노자의 『도덕경』을 통하여 도교의 ‘무위자연’ 사상도 받아들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각기 일가를 이루어나가던 유교와 불교 및 도교는 서로 소통하며 조화시키려는 흐름이 나타났다.

신라의 6두품 출신 유학자인 최치원은 「난랑비서」를 통하여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외래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아우르려는 이상을 글로 남겼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벼슬에 올랐던 그는 그곳에서 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사상적 흐름을 경험하였다. 이에 따라 유·불·선 융화의 가르침이 담긴 ‘풍류도’를 더욱 진흥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사상은 『계원필경』과 『사산비명』 등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고려시대의 유학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는 1세기에서 8세기까지 동아시아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서이다. 12세기에 편찬되었으나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담았기에 유교와 불교 및 도교가 서로 충돌하고 융화하는 사상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 유교적 입장에서 교훈주의적 색채로 쓰인 삼국 흥망의 역사를 통하여, 당시 삼국이 유·불·선의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13세기에 고려의 승려 일연에 의해 편찬된 『삼국유사』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가 융화를 이루는 삼국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몽골 침략 이후 원나라 간섭기에 그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한민족의 기원에서부터 신이한 일들을 기록하며, 불교를 중심으로 삼국의 사상을 조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김부식의 기록과는 다른 삼국의 사상을 추적할 수 있다.

삼교 융화의 흐름은 당나라에서 삼국으로, 이어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백제를 통하여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수용하였다. 백제는 유교 경전과 『천자문』 등을 전해주었으며, 불교와 불교문화도 전파하였고, 노자의 『도덕경』을 전하여 도교의 ‘무위자연’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1세기에서 8세기까지 일본 사상계의 흐름은 8세기 초에 도네리 친왕이 지은 『일본서기』를 통하여 추적할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용한 유교와 불교 및 도교가 일본의 방식대로 융화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유·불·선의 수용을 통해 일본이 점차 중앙집권화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토착신앙인 신기신앙(神道)을 중심으로 불교와 유교를 아우르는 신·유·불 습합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유·불·선이 충돌하고 융화하는 동아시아 각국의 사상적 흐름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1세기에서 8세기까지를 다루는 고전들에는 동아시아 의식의 충돌과 융화의 과정이 담겨져 있다. 동아시아 의식의 오래된 용광로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소통과 화합의 가치는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의식의 저변을 이루는 다원주의적 사상과 종교문화의 시작점을 추적해보는 중요한 이유이다. 1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인물과 고전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할 가치를 돌아보는 여정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한국사연구회 회장, 중국의 고구려사왜곡대책위원장,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고려대학교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했으며 『삼국유사』에 보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그리고 유·불·선의 충돌과 융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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