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헐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드는 ‘파가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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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헐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드는 ‘파가저택’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3.05.1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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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파가저택의 연원

파가저택(破家瀦澤)은 조선시대 때 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죄인이 거처하던 집을 헐고,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처분을 말한다. 대역죄인, 혹은 강상 윤리를 저버린 패륜아에게 내린 형벌이다. 이런 독특한 형벌의 기원은 고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 산동성(山東省)에 위치했던 주루국(朱樓國)의 정공(定公) 때 일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자기 아버지를 시해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공은 놀라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면 그를 죽인 뒤 그가 살던 집을 허물어 그 집터에 웅덩이를 파서 못을 만든다’고 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파가저택 처분은 고려시대에도 확인된다. 공양왕 때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죽은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반역죄를 다스리기 위해 집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 것을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다는 기사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역신(逆臣)의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것은 이미 죽은 죄인을 다시 벌하고, 미래에 징계를 보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효종실록』 효종 3년 2월 22일.

이런 처분을 내리는 이유에 대해 조선 효종 때 사헌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죄인의 가족들의 삶의 터전을 박탈하면서까지 죄인의 흔적을 연못으로 남겨 후세에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북 완주군 천주교 신자 유항검(柳恒儉)의 생가 터 모습. 조선 정부에서는 신해박해 당시 순교한 유항검의 집을 허물고 연못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에서 보듯이 현재는 천주교 초남이성지로 성역화되었다. 전북중앙신문 제공

조선왕조 파가저택의 사례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반역죄인만 파가저택을 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세종 때 고을 수령을 고소하거나 능욕하는 백성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제정되었는데, 수령을 능욕한 자는 고려시대의 전례에 의거하여 집을 부수고 연못을 만들어 삶의 터전을 박탈하고, 일가족을 고을에서 쫓아내는 처벌을 내렸다. 

예컨대 세종 21년(1439년)에 황해도 해풍군의 황득부(黃得富), 이듬해 경상도 진주의 정현룡(鄭現龍), 단종 즉위년(1452년)에 경상도 영덕현의 사노(私奴) 말응(末應) 등에게 이런 처분이 내려졌다.

위의 사례에서는 파가저택을 당하는 죄인이 그나마 목숨을 면했지만, 대역죄인의 경우는 파가저택에 앞서 처형을 피할 수 없었다. 광해군 10년(1618)에 역적으로 몰린 허균(許筠)과 그의 도당 하인준, 김윤황, 우경방, 현응민, 황정필 등을 능지처참에 처하고, 이어 전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헐어 못을 만드는 형벌이 시행되었다. 또한 인조반정 직후에는 광해군대 권력을 농단한 것으로 지목된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도 동일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규장각 소장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극형을 받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데 대역죄인에게는 자신이 사는 집에 대한 파가저택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고을에까지 연좌제가 적용되기도 했다. 인조 10년(1632)에 국왕 인조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궁중 저주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대비전의 궁녀 옥지(玉只), 귀희(歸希) 등은 역적의 괴수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의금부에서는 이와 동시에 이들의 집을 부수고 집터에 연못을 파며 일가족을 연좌시켜 재산을 몰수하였다. 아울러 해당 고을 수령을 파직시키고, 고을의 읍호(邑號)도 강등시켰다. 읍호 강등은 예를 들어 군(郡)이었던 고을을 현(縣)으로 내리는 것과 같이 읍의 격을 한 단계 떨어뜨리는 형태를 말한다. 연좌제의 고통이 가족뿐 아니라 고을민과 고을 수령에까지 미친 것이다.


몰수 재산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럼 파가저택 처분이 내려진 죄인들의 가옥을 비롯한 몰수 재산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아까운 집을 그냥 헐어서 없앤 것일까?

효종 3년(1652)에 반역을 도모한 죄목으로 김자점(金自點)과 그 일파 조인필(趙仁弼) 등이 처형되었다. 당시 역적죄로 몰수한 집만 33곳에 달했는데, 여러 관청에서 몰수한 토지와 가옥의 재목, 기와 등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이 일어났다. 

이때 국왕 효종의 명에 의해 김자점 부자의 집 사랑채는 임시 관청인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창고 건물 신축에 쓰였으며, 조인필의 집은 어영청(御營廳)에서 접수하였다. 또한 나머지 죄인들의 몰수 가옥도 모두 팔아 호조(戶曹) 경비에 보태도록 했다. 역적 괴수에 해당하는 인물에게만 파가저택을 명하였고, 그마저도 집을 헐어 생기는 재목 등을 건축자재로 재활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파가저택에 관한 규정은 조선후기 법전에 속속 공식화된다. 먼저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역모죄인, 부친 시해 죄인에 더하여 남편 살해 죄인도 자녀를 노비로 삼고 파가저택을 행하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 규정이 마련된 시기는 선조 30년(1597)이다. 파가저택 시행이 너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이항복(李恒福)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규화된 것이다. 이유는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三綱)이 하나라는 논리에서였다.

숙종 11년(1685)에는 아비의 해골을 불태운 자 또한 강상죄인으로 규정하여 파가저택 후 처자를 노비로 삼고 고을 수령을 파직하고 읍호도 강등시키도록 했는데, 이 규정은 『전록통보(典錄通考)』에 실렸다.

 

『속대전』 형전 「추단(推斷)」조에 실린 강상죄인에게 시행한 파가저택 관련 규정. 사진의 왼쪽에서 여섯째 줄에 해당 규정이 나온다. 규장각 소장.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당시 시행되던 파가저택 관련 내용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부모와 남편을 살해한 패륜범, 주인을 시해한 노, 관장(官長)을 시해한 관노(官奴)를 강상죄인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형한 후 처자식을 노비로 삼고 파가저택을 시행하도록 했다. 죄인이 살던 고을의 읍호 강등과 고을 수령 파직 조치도 함께 이루어지도록 했다. 


“어찌 땅까지 죄줄 수 있겠는가?”

조선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강상죄를 저지른 죄인을 처형한 후 고을 읍호를 강등시키는 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지금은 팔도(八道)의 명칭을 도내의 두 큰 고을을 합쳐서 일컫는데, 윤리와 강상을 범한 큰 죄인이 생기면 문득 도(道)의 명칭을 바꿔 버린다. 예를 들면 충청도(忠淸道)를 혹 공홍도(公洪道)라고도 하고 혹 청홍도(淸洪道)라고도 한다. 그 명칭이 일정하지 않고 몇 해 후면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되돌아가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성호사설』 권10, 인사문(人事門) 개역도명(改易道名).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를 합한 명칭인데, 예를 들어 충주에서 강상죄인이 발생하면 충청도라 하지 못하고 공주와 홍주를 합한 공홍도, 또는 청주와 홍주를 합한 청홍도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익은 사람이 아닌 땅에게 죄주는 이와 같은 조치가 무슨 실익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가 책에서 파가저택 조치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이 살던 집을 부수는 파가저택 조치 또한 그의 눈에는 불합리한 처분으로 비추어졌을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실학자 이익의 비판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파가저택 조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컨대 순조 1년(180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 유항검(柳恒儉)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목으로 전주 풍납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그의 집 또한 파가저택 처분이 내려졌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한 김옥균(金玉均)의 묘소.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조선왕조 최후의 파가저택 조치는 김옥균(金玉均)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1894년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후 그의 시신은 지금의 양화대교 인근에서 다시 육시(戮屍)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 고종은 김옥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부수고 연못을 만들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윤허하였다. 파가저택 조치가 갑오경장으로 연좌제가 폐지되기 바로 직전까지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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