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의 선언문”이자 “구조주의의 진정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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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선언문”이자 “구조주의의 진정한 성경”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5.0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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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 레비스트로스 지음 | 박정호·박세진 옮김 | 파이돈 | 160쪽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로서 구조주의의 선구자이자 사회인류학자이다. 마르셀 모스의 저작에 대한 그의 『서문』은 원래 모스의 초기 저작 모음집인 『사회학과 인류학』(1950)의 서문으로 쓰였고 데리다, 라캉, 바르트, 푸코 등에 의해 독자적 의의와 논쟁사를 지닌 텍스트로 주목을 받았다. 

이 글을 쓸 당시의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충실하게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언약의 땅으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했으나 그 영광을 미처 보지 못했던 모세처럼 모스 역시 엄청난 가능성의 언저리에서 멈추고 말았다.”(59쪽)라고 말하며 뒤르켐 및 모스와 자신을 구별 짓는다. ‘언약의 땅’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였다. 그는 이제 막 첫 성과를 낸 구조주의라는 탐구 방법을 프랑스 사회학의 거장 모스의 저술에서 연역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럼으로써 많은 이들은 『서문』을 일종의 ‘구조주의 선언문’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구조인류학이 남긴 성과와 영향력을 적극 인정하는 관점에서는 『서문』을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또는 롤랑 바르트에게 기반을 제공한 핵심적 텍스트이자 구조주의의 진정한 ‘성경’으로도 평가한다. 

『서문』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시도한 것은 모스의 저작에서 구조주의적 사유의 원형을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뒤르켐의 사회학은 구조주의에 도달할 수 없었던 반면, 모스의 저작 곳곳에는 구조주의를 시사하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그 단서들 가운데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사회학과 심리학의 연관성 및 상징체계의 고유한 효력에 대한 모스의 성찰이다.

옮긴이들에 따르면, 상징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규명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진술이 『서문』 전체를 요약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과 질서, 현상은 모두 상징체계를 통해서만 출현하고 존재할 수 있다. 『서문』은 “모든 사회적 현상을 언어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모스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 “언어학에 점점 더 밀접히 결합”하면서 “언젠가 언어학과 함께 방대한 커뮤니케이션 과학을 이룰” 인류학의 미래를 전망한다. 이런 점에서 역자들의 해설은 상징체계의 커뮤니케이션을 대상으로 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하나의 상징체계)이 어떻게 작동(사고)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뒤르켐은 사회적인 것을 개인을 강제하는 구조로 개념화함으로써 이 과제를 처리하고자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에게 기대어 상징체계를 출발점으로 설정해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인과적이기보다는 상보적임을 논증한다. 모스는 상징체계가 작동하면서 사회적-심리적-생리적인 것이 서로 공명한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밝혀냈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모스의 관점을 이어받는다.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보다 더 실재적이며,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고 그것을 결정한다.”

사회적인 것은 상징체계를 통해 총체화되는 나머지 두 차원(심리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을 대표한다. ‘총체적인 심리적 사실’이나 ‘총체적인 생리적 사실’ 같은 표현으로는 체계화하는 상징체계 고유의 특성을 포착할 수 없다. 총체적 사실은 언제나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이다. 이렇게 상징체계를 통해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지위를 방어한 뒤 레비스트로스는 논의의 초점을 인식의 문제로 이동시킨다. 모스가 제안한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 즉 사회적-심리적-생리적인 것의 만남과 종합은 오직 구체적이고 평범한 개인 ‘안에서만’ 이뤄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어낸다. 총체적 사실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지만, 반드시 구체적 체험의 주관성을 경유해야만 ‘인식’될 수 있다. 이는 총체적 사실을 구체적 인간의 체험 수준에서 연구하는 과업에 특권적 위상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과학의 익숙한 난제 즉 관찰에서 주관성을 제거하는 문제, 주관적 객관성이라는 이율배반적 요구의 문제를 증폭시킨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주관성의 다른 차원으로 눈을 돌린다. 민족학자와 원주민이 ‘나’라는 사적 개인으로서 의식하고 참조하는 주관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공통된 ‘가장 보편적 주관성’, 의식적으로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주관성이 아니라 의식이 미치지 않는 ‘가장 내밀한 주관성’이 그것인데 가장 보편적인 이 주관성의 다른 이름은 집합적 사고의 범주와 동일시된 ‘무의식’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설정한 인식론적 난제를 해소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관찰의 문제를 무의식의 법칙적 활동을 확인하는 문제로 치환시킨다.

『서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증여론』에 대한 논평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의 대표작인 이 작품에 사건적 지위를 부여한다. “민족학적 사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험적 관찰을 넘어 더 근원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증여론』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증여론』은 “모스가 통과하지 못한 결정적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드러낸다. “전체의 통일성은 그 각각의 부분들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원칙에 반해 교환을 해명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증여론』에서 개진된 아이디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심도 깊은 영향력을 끼쳐온 것, 즉 주고, 받고, 돌려줄 삼중의 의무를 통해 선물의 순환이 이해될 수 있다는 착상이 바로 모스가 자기 자신에 반해 설치한 사고의 장애물이라고 본다. 『서문』에서 개진된 레비스트로스의 반론은 교환을 요소들의 합성물 즉 “줄 의무, 받을 의무, 돌려줄 의무라는 뼈대 세 개를 감정적, 신비적 접착제[하우]로 붙여 만든 복합적 체계”가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의무들이 아니라 교환 자체를 “근원적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우는 주고, 받고, 돌려줄 의무들을 접합시켜 교환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한편으로 상징체계를 통해서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부과된 운명, 다른 한편으로는 기호로서 상징체계에 포섭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운명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와 너는 교환(=커뮤니케이션)하도록 운명지어져 있고 사물은 교환(=커뮤니케이션)되도록 운명지어진바, 하우는 이 같은 무의식적 요구를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관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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