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에서 주요 명제의 논리적 관계에 주의하는 일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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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에서 주요 명제의 논리적 관계에 주의하는 일의 중요성
  • 이민열 한국방송통신대학·법학
  • 승인 2023.05.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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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칼럼]

모든 논증에는 그 논증에 명시적·묵시적으로 등장하고 결합되는 주요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가 전제된다. 그래서 논증의 가장 큰 틀은 바로 자신이 논증에서 내세울 주요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 관계에 맞게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주요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의 명확한 인식이 특별히 필요한 이유는 글자들의 음운을 파악하는 능력과는 달리, 논리적 관계를 활용하는 능력은 명확한 인식을 통해 실수를 범하지 않고 또 더 잘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정된 논리적 관계가 실제로는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임에도 그렇다고 잘못 착각하여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추론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우선 논증이 복잡하거나, 어떤 명제가 갖는 함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면 논리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쟁점들이 중층적이고 복잡하게 연결될수록, 묵시적으로 등장·결합하는 명제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명제들에만 주의가 집중되기 쉽다. 또한 논의의 세부 사항이 많아지다 보면 오히려 그 세부사항을 논의하게 된 이유인 주요 줄기에 관해서 당연히 해야 할 검토를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등장시킨 명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명제의 함의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틀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책 『호모 사피엔스』가 이런 실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 책의 주요 명제 중 하나는 정의의 원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인간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의 원리가 산소나 질소의 상호작용과 달리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실험에 의해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주장 ⓐ)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책 한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주장 ⓑ: Yuval Noah Harari, Sapiens,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김영사, 2011, 211면)라고 과감하게 쓰고 있다. 

그런데 주장 ⓑ에 내재된 주장이 ‘사회정치적 차별을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면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 ‘사회정치적 차별을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면 사회적 차별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경우를 나누어 생각해보자. 만일 ‘사회정치적 차별을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같은 이유로 평등 대우를 해서도 안 된다. 우선 평등 대우를 하라는 이념 역시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평등 대우를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도 없다. 인종이 다르다는 생물학적 사실 명제로부터는 인종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치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하라는 규범 명제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근거가 없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면, 사람은 차별 대우를 해서도 안 되고 평등 대우를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회정치적 대우에 관해서 행동 마비 상태에 빠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유발 하라리가 주장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제, 이와 달리, 차별을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과 평등 대우를 할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인간이 어느 쪽으로든 실천적 지침으로서 구속을 받을 당위란 아예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것과 관련해서 인간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즉 차별과 평등 대우 중 어느 쪽도 옳지 않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는 신화가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들이 어느 한 쪽이 옳다고 착각할 뿐이고, 그래서 그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그저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다. 이는 비단 차별하는 행위와 평등 대우하는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차별과 평등 대우에 관한 역사를 공부하는 행위에도 적용되는 이치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실천적 이유, 즉 역사를 공부해서 차별이란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서 차별을 계속 실행하여도 잘못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맥락에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표현을 쓰는 순간 묵시적으로 ‘어떤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 명제를 묵시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명시적으로는 부인한 주장을 묵시적으로 다시 참이라고 전제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적으로 모순이다. "'― 해야 한다'는 형식의 당위 주장은 어느 것이나 무의미하고 신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점을 알기 위해 역사 등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순을 유발 하라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제들의 논리적 관계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순에 해당하는 잘못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게 되며, 스스로 결코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민열 (李珉烈, 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법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이자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철학과 분석철학의 성과를 발전시키고 활용하여 헌법해석의 정교한 논증대화적 틀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고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철인왕은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등을 쓰고 『권리란 무엇인가』, 『자유의 법』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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