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 김민수와의 두 번의 대화…우리말은 어떻게 국어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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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김민수와의 두 번의 대화…우리말은 어떻게 국어가 되었나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5.0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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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이 국어가 되기까지: 대화로 읽는 국어 만들기의 역사 | 최경봉·김양진·이상혁·이봉원·오새내 외 1명 지음 | 푸른역사 | 384쪽

 

언제나 곁에 있기에, 늘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에 우리는 ‘우리말이 어떻게 국어가 되었나’라는 근원적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국어’가 항상 ‘국어’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고, 해방 후에는 무엇을 ‘국어’로 할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이 책은 ‘국어’의 이 같은 파란만장한 역사 탐색이다. 저자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고 자랐음에도 ‘국어’를 놓지 않고 “우리말과 우리 삶의 문제에 학문적인 해답을 내놓았던 국어학자” 김민수(1926~2018)와의 대담을 통해 근현대 국어학과 국어 정책의 역사를 촘촘히 훑는다. 저자들이 국어학자 김민수와 함께한 여정에는 해방 직후의 식민 잔재 청산과 한글 위상 강화에서 1960~70년대의 규범문법 확립과 근대 어문개혁 완결까지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먼저 국어학자 김민수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1926년에 출생한 선생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을 구독하던 친형 김윤수의 영향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과대 진학을 꿈꾸었던 19세 청년은 1945년 해방 직후 열린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우리말 연구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945년 조선어학회 국어강습원 파견 강사 선발 시험에 응해 합격한 후 한글 보급 운동에 참여하였다.”

저자들은 2007년 해방 이후 국어 정립을 위한 학술적·정책적 활동 양상과 관련한 김민수의 증언을 들었다. 김민수와의 첫 번째 대화였다. 두 번째 대화는 고인이 된 김민수와의 ‘대화’였다. 김민수의 증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이 남긴 증언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하고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증언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이렇게 이루어진 두 번째 대화의 결실이다.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구술자 김민수의 생생한 증언이다. 열여덟 살 소년이었던 김민수가 일제에 강제로 징병되어 ‘개죽음’당하기 싫어서 교사 검정 시험을 준비했다는 진술(25쪽), 교사 검정 시험에 합격한 후 총독부의 발령을 받아 취업해야 징용이나 징병을 유예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마포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는 “야,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안도했다는 증언(34~5쪽)에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이 오롯하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게 애초부터 완전동화를 계획한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조선 민족을 그냥 육체만 남기고 완전히 소멸시켜버리자’라는 정책인 거지요. 오늘날 평가한다면 천인天人, 하늘과 사람이 함께 공노할 흉계이지요”(38~9쪽)라는 한탄은 작금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정리는 구술자 김민수의 증언에 힘을 보탠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의 국어강습회 수업을 듣고 국어학에 첫발을 들였다는 김민수의 말에 저자들은 한글학회가 2010년 발표한 《한글학회 100년의 줄거리》에 기록된 조선어학회 주최 ‘국어과 지도자 양성 강습회’의 일정과 과목명, 강사 명단 등을 덧붙임으로써(59쪽) 김민수의 기억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1950년대 국어 정책에서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한글 간소화 파동에 대해 김민수가 말하자 저자들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기자회견에서 당시 맞춤법에 대해 ‘불편하다’와 ‘어렵다’, ‘보기 좋지 않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280쪽) 독자들이 당시 상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들은 구술이 “구술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의성이 없더라도 구술자의 기억이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구술자의 구술을 존중하되 다른 구술자의 구술이나 당대의 문헌 자료와 대조”함으로써(11쪽)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거나 당대의 상황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예컨대 1958년 문교부의 〈로마자 한글화 표기법〉이 김선기 개인의 안이라는 김민수의 말에 저자들은 김선기가 “국어심의위원회 외래어분과장으로서 그 안을 만드는 데 조력은 많이 했으나 저 개인의 안이 아님을 밝힌다”고 반박했다는 기록을 제시하여 독자들의 균형감 있는 사실 인식을 돕는다(295쪽).

해방 직후 ‘국어’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우리말 되살리기를 통해 서서히 되살아났다. 국어 회복을 위한 국어학계의 활동은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국어 정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조선어학회는 한글 풀어쓰기 등 일부 연구자 특유의 주장을 규범화하려 함으로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어 정책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체계화되었다. “정부에서는 국어 정책을 세우고, 민간에서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글 강습과 사전 편찬에 나서고,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과를 개설하여 우리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수했던 것이다.”(139쪽) 이처럼 광복 이후 이어지던 국어 재건의 학문적 분위기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자료 유실, 연구자 사망, 납북과 월북 등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대학 설립 후 국어학을 배우기 시작한 2세대가 국어학 연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2세대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 도입을 추구하고 학술지와 학회 등을 통해 학문적 경향을 공유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한국어의 어문 규범 정립, 사전 편찬, 한국어 연구와 교육을 위한 토대 마련이라는 근대적 과제는 해방 이후 교과서 편찬, 1950년대의《큰사전》 발간 등으로 일단락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과제를 완결하는 단계에서 한글 간소화 파동이라는 어문 규범을 둘러싼 격렬한 의견 충돌을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국어 연구와 국어 정책 활동 기록은 단순한 사실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인물 등의 구술로 기록의 빈칸을 메울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억과 대화를 통해 근현대 국어 만들기의 역사를 살핀 이 책은 근현대 국어학과 국어 정책의 전개 맥락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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