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서 완전한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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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 완전한 자유를 허하라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5.0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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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 레프 톨스토이 지음 | 박미정 옮김 | 바다출판사 | 424쪽

 

톨스토이의 교육에 관한 11편의 글을 모은 이 책은 당시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 쏟아지는 기성 교육계의 공격에 맞서 잘못된 교육 행태를 비판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자유, 삶, 민중 중심의 독창적 교육철학을 제시하는 책이다. 작가 톨스토이에 가려져 있던 ‘교사 톨스토이’ ‘교육학자 톨스토이’를 만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서 자신이 행한 자유로운 교육에 대해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를 부정하는 극단적 행위라는 비판을 받자 이를 재반박하며 ‘교육’과 ‘훈육’을 구별한다. 훈육과 교육의 차이는 바로 강제성으로, 훈육은 강압적이지만 교육은 자유롭다. “훈육은 우리에게 훌륭해 보이는 사람을 양성할 목적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영향이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다.”

전제주의 체제 아래 당시 학교는 교사의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훈육, 처벌과 시험에 의존했다. 김나지움과 대학에서도 손을 들어 자유롭게 질문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톨스토이에게 교육의 유일한 규범은 자유다. 여기서 자유란 학교가 피교육자의 신념이나 인격에 개입하지 않는 것, 피교육자가 요구하고 원하는 가르침을 받는 수 있는 자유를 피교육자에게 완전히 위임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발전할 권리를 가졌으며, 자유가 진정한 교육의 필수조건이고, 처벌의 위협과 보상의 약속은 이를 방해할 뿐이다. 강제로는 아무런 결과도 낳을 수 없거나 비참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때로 톨스토이가 실제로 학교 교육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성 교육의 강제적인 요소에 반대하기 때문이고, 루소처럼 인간은 완전하게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전혀 훈육되지 않은 사람 즉 자유로운 교육의 영향을 받은 민중이 어떤 훈육이라도 훈육을 받은 사람보다 더 순수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자립적이고, 공평하고, 인간적이고, 무엇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다. 반면에 “훈육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갈망이다. 훈육자가 열심히 아이들의 훈육에 전념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이들의 순수함에 대한 질투와 아이를 자신과 닮게 만들려는 바람, 즉 훨씬 더 망가뜨리려는 희망이 이와 같은 갈망의 기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는 인류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 타락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물만을 양성할 뿐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결국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최선인가라는 물음이다. 톨스토이는 아이들이 지겨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말고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라고 말한다. 교사가 자신이 맡은 과목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할수록 그의 가르침은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된다. 성공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강제가 아니라 먼저 학생의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 좋은 교사는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하며, 교육의 실패가 학생의 잘못(학생의 게으름, 장난기, 우둔함, 귀 기울이지 않는 태도, 눌변)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는다.

이 책의 글들은 톨스토이가 교육사업에 관심을 갖고 유럽을 여행하며 교육학 이론을 공부하고 수업을 참관하던 30대 초부터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교리의 강조로 돌아선 말년까지를 아우르지만, 글의 관심은 시종일관 인민교육, 민중교육의 활성화였다. 특히 톨스토이가 관심을 둔 것은 읍내에 있는 정원이 수백 명씩 되는 큰 학교가 아니라 드넓은 농촌에 드문드문 퍼져 있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학교, 여름에는 농가일을 돕고 겨울의 7개월 동안만 운영되는 계절 학교, 도시의 교사가 월 200루블을 받을 때 마을들을 돌며 월 2루블(한 농가당 15코페이카씩 모아 만든)에도 가르치는 교사들이 운영하는 농촌학교였다. 

그러나 정부와 자치단체, 학교위원회는 농민의 현실과 동떨어진 기준을 강요하기 일쑤다. 꼭 호화로운 건물에 엄청난 보수를 받는 교사들이 있어야만 학교인가. 농부의 헛간이 학교가 될 수도 있고, 교회지기가 교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교육가들은 마치 내기라도 하듯이 어떻게 하면 교육을 더 힘들고, 더 복잡하고, 더 비싼 것으로 만들까 궁리하고” 있지만, 학교 성공의 열쇠는 설립 “방식의 간소화, 단순화, 학교 건설의 저렴화”이다. 톨스토이는 민중에게 원하는 학교를 설립할 자유를 주고, 관은 학교를 조직하는 일에 최대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구체적 물음에 대해서도 톨스토이는 민중의 요구를 따르라고 말하며, 읽고 쓰기와 연산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신식 교육학자들은 역사, 지리, 과학, 외국어 등을 강조하지만 민중은 언제나 국어와 수학을 가장 필요한 기초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민중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동등한 교육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나, 전제정치는 여전히 인민교육사업에 족쇄를 채우고자 했다. 톨스토이는 교육받은 이들, 귀족과 관료층을 민중과 대비시키며 진보의 당파성을 지적한다. “진보는 사회의 작은 일부를 위한 혜택이다. 사회의 대부분은 진보를 악이라 여긴다. … 진보는 민중이 더 손해를 볼수록 교양 있는 집단은 더 이익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고 있고 동등한 교육의 요구는 거스를 수 없다. “진보주의자들[독일식 신교육을 도입한 교육가들]은 민중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민중은 진보주의자들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민중은 자신들의 지적인 발달이라는 위대한 일에 거짓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세기말 격변기에 민중의 교육에 대한 요구를 대변하고 그 구체적 해결 방안을 모색한 위대한 교사이자 교육학자로서의 톨스토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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