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고 교묘한 차별에 저항하는 신랄한 열두 편의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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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 교묘한 차별에 저항하는 신랄한 열두 편의 논픽션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5.06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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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 데어라 혼 지음 | 정희진 해설 | 서제인 옮김 | 엘리 | 364쪽

 

이 책은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죽은 유대인들을 즐겨 소비하는 세상의 뒤틀린 애착을 흥미롭고도 논쟁적으로 탐구한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수록 반유대주의가 줄어든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구멍을 내고, 홀로코스트를 인류의 ‘보편적’ 경험으로 마케팅하는 일이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폄하하는 방식들을 밝혀낸다. 『안네의 일기』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진짜 이유를 비평적으로 제시하며, 하얼빈, 마르크 샤갈, 한나 아렌트에 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이 책은 총 열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인이라는 타자를 영원히 죽음/고통 속에 박제해놓고 싶어하는 세상의 편견에 경종을 울리는 날카로운 비평적 장들이 한 축을 이루고, 유대인이나 유대문화에 관해 우리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깨우쳐주는 해설적 장들이 나머지 한 축을 이룬다.

저자는 1장에서 『안네의 일기』가 전 세계적으로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안네에게 미래가 없었고(즉, 죽었고) 그 일기에 안네가 수용소에서 본, 독자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학살의 참상이 들어 있지 않아 마음 편히 소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안네의 일기』처럼 감금된 상태에서 쓰였고 죽은 뒤에야 발견되었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지옥 같은 삶을 ‘고스란히’ 기록한 잘만 그라도프스키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라고. 그의 작품은 인기도 얻지 못했고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2장은 ‘유대교의 유산이 담긴 하얼빈의 명소들’을 방문하고 온 이야기로, 저자는 하얼빈 얼음축제에 매혹되어 그곳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면서 이 명소들에도 가보게 되었다. 1896년 만주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할 때 수많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하얼빈에 이주해 도시의 기초를 건설했는데, 30년 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반유대주의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서 이 유대인들은 거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살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다. 하나의 도시를 거의 세우다시피 해놓고 빈손으로 내쫓긴 그들의 과거는 전 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하얼빈에는 옛 유대교 회당을 개조해 만든, 추방된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물건들과 유대인 밀랍 인형들을 채워 넣은 박물관, 껍데기만 만들어놓고 내용은 없다시피 한 유적들이 가득하다. 자본주의 관광사업의 일환이 되어 있는 이 유적들의 공허함과, 하얼빈에서 살았던 짧은 황금시대를 그럼에도 가장 행복한 시기로 회고하는 유대인들을 대조하면서 아이러니한 어조로 역사를 서술한다.

4장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이디시어로 연극을 했던 베냐민 주스킨이라는 한 배우의 삶을 따라가며, 소비에트 연방이 그와 같은 예술가들을 처음에는 높게 대우해주다가 유대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했고, 목적이 다한 뒤에는 처형해버렸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민족에 대한 ‘문화 말살’에 알게 모르게 가담해버린 한 인간의 이야기가 인간의 삶에 대해, 예술에 대해 많은 여운을 남긴다.

5장은 일종의 문학 비평 챕터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독자로부터 받은 “조금 더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키고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인류에 봉사하는 책을 써달라”라는 항의 편지(에 대한 항의)에서부터 시작해 미국/서양/기독교 문학의 전통과 이디시어/히브리 문학을 비교, 대조한다. 전자의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을 때 자동적으로 ‘좋은 인물들이 구원을 받거나 에피파니의 순간이 있거나 인물들에게 은총의 순간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모든 문학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룰이 아니다. 이디시어/히브리 문학에는 완결감 있는 해피엔딩이 존재하는 대신 결말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놀랍게도 저자는 이것을 “부서지고 회복되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기 위한 종교적이고 의도적인 장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11장에서 저자는 『베니스의 상인』이 유대인 샤일록을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고, 이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기에 유럽 전반에 퍼져 있던 소문들―유대인들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살인을 하고 사람의 살을 매매했다는 혐오에 찬 소문 같은―의 존재를 알려준다. 이 작품이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적 분위기에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이름에 걸리는 추앙 때문에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도, 자신도 애써 알아보지 않으려 했고, 그럼에도 이제 알게 되어 참담하다는, 자녀 세대 유대인들에 대한 근심을 담아내고 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이 어느 미국인 ‘구조자’에게 빚지고 있음을 써 내려간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대하여」(8장)는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계 예술가들과 석학들(한나 아렌트,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막스 에른스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앙드레 브르통)에게 비자를 만들어주고 안전한 나라로 탈출시켰던 ‘선한 비유대인’ 조력자 배리언 프라이의 생애에 관한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유대인들을 구했는데도 그의 이름은 역사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에게 구조된 유대인 예술가들 대다수는 안전해진 뒤, 구조 활동을 계속하게 작품으로 참여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평생 감사의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런 기이한 태도 기저에 깔린 심리를 분석한다. 또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프라이가 당시 다른 ‘보통의’ 유대인들의 구조 요청은 무시하고 오직 ‘유명한 예술가들만’ 구조해주었으며 그 때문에 속물이라 비난받았던 일, 분노조절장애에 가까워 보였던 그의 다혈질 등 그를 둘러싼 많은 이상한 뒷얘기와 후일담들을 전한다. 또한 할리우드가 열광하는 ‘선한 비유대인 구조자들 서사’에 관한 이야기와 한나 아렌트의 ‘악의 진부함’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10장 「블록버스터급 죽은 유대인들」은 큰 흥행을 거둔 블록버스터 전시회 〈아우슈비츠〉에 대한 비판의 장이다. 이 전시회의 기획은 중국에서 인체 표본을 대량으로 입수해 비판받은 적이 있는 〈인체의 신비〉를 기획했던 바로 그 회사가 맡았다. 작가는 이 방대한 전시회에 직접 가보고, 여기 전시된 유대인들의 물건들이 모두 실존했던 사람들의 물건임을 지적하며, 가스실, 고문실, 나치즘에 관한 방 등 지나치게 방대하고 자세하고 구체적인 전시가 ‘사람들이 이 전시를 보고 나면 반유대주의에 반대하고 유대인을 존중할 것이다’라는 의도와는 정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너무도 압도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거기에 못 미치는 반유대주의적 혐오와 편견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역효과를 낸다고 주장한다.

유대 문화에 대해 “평생에 걸쳐 배울 것과 끊임없이 질문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 “불편함을 요구하는 문화”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을 그럴듯한 해결책이나 결론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선동이나 행동지침으로 맺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무서운 질문을 던져놓을 뿐이다. ‘당신은 왜 죽은 유대인만 사랑하고 애도하는가. 왜 살아 있는 내게서 죽은 유대인을 보는가. 당신은 왜 당신의 살아 있는 이웃을 환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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