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치유와 화해의 길은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정의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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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치유와 화해의 길은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정의의 결합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3.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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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3강>_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폭력: 개인, 조직, 정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43강 박명림 교수(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박명림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인간들은 왜 폭력을 반복하는가”를 질문한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인간 역사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계속 반복”되어왔기 때문으로, 특히 현대의 시기라 할 20세기가 “문명 내의 폭력, 인간들 사이의 폭력이 절정에 달했던 최악의 세기였는지도” 모르겠다면서 “인간들에게 가장 깊은 하나의 의문”이 가혹한 내전, “즉 동족과 근친 상잔(相殘)의 문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인간에 의한 폭력 중지의 가능성”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는바 소위 “누가-누구를(kto-kovo)” 관념과 구도를 넘어서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정의’가 결합한 화해와 치유의 길로 발걸음을 디뎌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 지난 2월 8일, 박명림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2월 8일, 박명림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평화적 폭력’, ‘평화적 재앙’의 시대에

인간들은 왜 폭력을 반복하는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몇몇 전쟁과 내전의 참상들은 인간 폭력의 완전 종식에 대한 희망을 접게 한다. 더욱이 평화의 시대라는 21세기 초엽 세계 난민 수는 물론 환경 재난과 전 지구적 불평등 역시 사상 최악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대전이 ‘물리적 직접적’ 폭력이었다면 오늘날은 ‘구조적 체제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 냉전시대라는 ‘폭력적 평화’ 상태를 지나 지금은 장벽시대라는 ‘평화적 폭력’ 상태에 접어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두 조합은 모두 역설적인 것이다. 전자는 폭력이 평화를 안내했다면, 후자는 평화가 폭력을 산생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평화 시대 오늘의 난민, 불평등, 질병, 환경 재난의 악화와 장기 만연을 종종 ‘평화적 재앙’(peaceful disaster) 상황이라고 부르곤 하여왔다. 평화가 어떻게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평화와 전쟁이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평화가 이겼다. 왜냐하면 전쟁은 무장한 군사들만 거꾸러뜨렸지만 평화는 비무장한 사람들마저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공격당한 사람에게 가능한 한 반격의 기회를 주었지만 평화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저항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도록 죽음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가공할 아우슈비츠 학살을 두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something unthinkable beyond the unthinkable)이라고 말한바 있다. 불행하게도 인간 역사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인간 역사의 본질이 폭력과 혁명과 전쟁의 반복은 아닌지 무겁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세사에서 비극은 왜 끊임없이 계속되는가?

폭력, 그리고 개인과 조직과 정치

폭력과 인간은 정치를 매개로 항상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그 관계는 지극히 모순적이다. 폭력은 인간 파괴 기능과 인간 보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폭력의 위험 앞에 놓여 있다. 때문에 인간들은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을 강구하기 위해 조직과 국가를 구성한다.

정치는 옳은 가치를 추구하되 폭력과의 동행은 필수다. 전자가 목표라면 후자는 수단이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정의하듯 정치의 근본 수단은 물리적 폭력이다. 이때 정치의 주체로서 국가 내의 물리적 폭력은 권력을 말한다. 따라서 베버는 “국가는 주어진 영토 내에서 폭력의 합법적 독점을 (성공적으로) 주장하는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 내린다.

정치의 핵심 기반 요소는 폭력이지만, 동시에 폭력은 제도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폭력의 제도화의 경로와 수준이다. 폭력의 통제와 갈등의 제도화 없이는 인간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정치가 항상 폭력과 제도 사이에서 이 연결 틈새와 가능성의 영역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정치를 통해 정치 이전(pre-political)과 정치 이후(post-political), 반(反)정치와 초(超)정치를 극복하고 연결하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전자는 폭력이나 힘을 말하고, 후자는 법률과 제도를 말한다.

‘카인의 후예들’

사실 인간(관계)의 첫 선조의 출발은 폭력, 그것도 살인 폭력과 함께였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인류 첫 형제 사이 인간관계가 살해 관계였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카인의 후예’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살인 이후 카인의 첫 답변은 “모릅니다”가 아니었는가? 전자가 학살의 범죄라면, 후자는 범죄 부인의 죄였다. 기실 카인주의는 카인과 아벨의 개별 행동을 넘어 인간관계의 일반적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장구한 과거의 인간 기록을 살펴볼 때, 인류 자체로는 지구적 인간 폭력, 또는 폭력의 총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인간들의 본성은, 적어도 살인과 살육과 전쟁에 관한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니면 폭력과 평화 지향의 두 본성을 다 갖고 있음을 증거한다. 폭력은 분명 특정의 조건과 상황에 맞추어 드러나는 인간본성의 한 측면이었던 것이다.

내전 – 형제 살인 - 자족(自族) 학살의 기원과 역사

파괴와 학살은 자기 공동체 내면을 향해서도 똑같이 자행된다. 결국 인간들에게 가장 깊은 하나의 의문은 가혹한 내전, 즉 동족과 근친 상잔(相殘)의 문제이다. 내부의 자기공격, 즉 자민족 학살/자족 학살(自族虐殺)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외부의 폭력은 처벌해야 하나, 내부의 폭력은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 기준은 똑같이 평등한 의미를 갖는 한 인간과 한 생명을 단위로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부 폭력도 똑같은 인간 폭력이다. 내부 집단 살해 역시 똑같은 집단 살해다. 게다가 극히 모순적인 동근원성의 역설을 기억해야 한다.

근원이 같은 내전이 더 잔인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동족을 포함해 사랑하는 또는 가까운 인간들은 ‘사소한 차이’에 대한 과도한 자기 집착과 확대해석으로 인해 점차 증오ㆍ갈등ㆍ전쟁으로 치닫는다. 사랑과 증오, 인간애와 폭력의 병행 발전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종교ㆍ형제ㆍ종족ㆍ문화ㆍ생활권 등 근원이 같고 오랠수록 인간들은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자라난다. 분리된 상대는 공동체를 파괴한 이단과 병균으로 간주되고, 제거를 위한 의지와 수단은 가장 강력하다. 폭력은 물론 전쟁도 불사한다. 소위 냉전 시대 살상과 학살은 대부분 이런 유형들이었다.

노예(의 폭력)에서 주인(의 폭력)으로? 또는 폭력에서 폭력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폭력의 절정을 보여준 전체주의는 분개심ㆍ적개심ㆍ분노ㆍ원한(ressentiment)의 제도화였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도덕에서 니체가 말한 ‘도덕상의 노예 반란’을 의미한다. 니체 철학의 핵심인 노예 도덕의 요체는 분개심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가. 노예와 주인의 역전이 폭력의 중단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분개심이 억압과 보복 폭력의 근원이 됨으로써 역전 이후 분명 더 큰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

상호 주인 대 주인, 주체 대 주체로서 공존할 때 자유, 자율, 독립이 폭력 중지와 극복의 제일 요체가 아닐 수 없다. 타도, 혁명, 청산, 척결, 제거, 학살을 포함한 일체의 역전과 전도는 평화와 공존의 길이 아니라 폭력과 억압의 길이었던 것이다. 소련과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2차 대전 이후 나타난 가공할 폭력의 크기와 잔인성에 비추어, 반동적 폭력과 혁명적 폭력 사이의 차이의 부재에 대한 오래전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의 때 이른 깊은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는 적대자들을 향했던 폭력이 혁명의 성공 이후부터는 인민대중을 향했기 때문이다.

폭력 대 폭력 대결의 최절정: 이른바 “누가-누구를(kto-kovo)” 관념과 구도에 대하여

폭력에 관한 한 근대 이후 최고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타도를 위해 급진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가와 이론가들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이들의 핵심적 실패는 아렌트가 강조하듯, 끝내 목적-수단의 전치 현상의 발생이었다. 폭력이라는 수단이 사회주의라는 목적을 압도한 것이다. 특히 폭력혁명과 교의를 위한 최고의 정초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레닌의 전략은 “누가-누구를 구도(the kto-kovo scenario)”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패와 악행은 바로 이 ”누가-누구를“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누가=우리가 누구를=적을 제거하고 타도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정당하고 옳았다.

“누가 누구를”, ‘적과 동지’의 이분법은 곧 정치의 증발이고 부재다. 정치를 적과 동지의 대결로 보는 순간 역설적으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이 실종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폭력을 동원한, 전쟁과도 같은 폭력 대결 이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폭력의 문제에 관한한 역사상 사회주의가 인류에 끼친 최대의 기여는 사회주의 자신의 평화적 퇴각과 붕괴에 있었다. 이는 그동안의 모든 폭력 및 권력의 등장과 쇠퇴의 기본 공식과 원리에 반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국가나 집단의 “폭력적 집권, 평화적 붕괴”라는 공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에 의한 폭력 중지의 가능성

인간들의 뭉침과 흩어짐, 단결과 대립의 수천 년 역사는, 종족적 언어적 혈통적 형제(애)보다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형제(애)가 훨씬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들은 직접 다툰 당시를 제외하고는 매 세대마다 전자가 더 중요하다는 중대한 착각과 편견, 오류와 몽매에 빠져 자신과 타인, 자기 종족과 다른 종족들을 함께 끔찍한 폭력과 살육으로 몰아넣는다.

아트레우스-아가멤논-오레스테스 3대에 걸친 친족 살해의 저주와 전통은 폭력 단절에 대한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 혈연과 가족과 종족이라는 선천적 생래적 요소보다는 정치와 법률과 종교라는 후천적 사회적 요소가 폭력과 평화의 결정요인에서 훨씬 더 우월적 결정적이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주어진 혈통 혈연 종족 범주와 정체성의 인위적인 시민 국가 정치 범주와 정체성으로의 대체 없이는 폭력의 중지는 어렵다.

가해자-피해자 구분, 또는 소위 ‘가피해자’에 대하여
 
자족 학살 못지않게 곤혹스런 문제는 가해-피해, 가해자-피해자의 명확한 구별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국가와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둘의 구분이 명백했다. 그러나 마을 차원에서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해와 피해를 구분하지 않으면 정의는 물론 화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인간들의 정의와 화해를 위해 가해-피해의 선명한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둘은 깊이 뒤섞인다. 인간들은 행동과 반응의 악순환으로 인한 상호 악화로 점점 더 많은 폭력을 사용하는 폭력의 상승과 나선형구조로 빠져든다.

그럴 때 마침내 양측 모두가 피해자라는 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지만, 동시에 양측 모두가 가해자라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따라서 양측 각각은 협력적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려면 자신들의 파괴적 행동을 인정하고 용서해야 한다. 가해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희생자들도 역시 비인간화의 범죄를 저질렀을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존중과 상호 안전에 대한 새로운 균형과 참된 인지를 통해 상호 피해에 대한 양쪽의 애도는 완성된다.

대량 폭력과 대량 학살: 문화 담론을 넘어

문화는 폭력과 학살을 저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대량 폭력과 대량 학살의 제일 요인도 아니다. 반인륜 범죄는 어디서나 국가와 권력의 것이며, 당, 군대, 경찰, 정보조직을 포함한 체계적인 조직과 관료 기구의 책임이다. 그것이 종교와 문화를 활용하고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어떤 문화도, 인간 학살의 가속 요소요 촉진 요인일 수는 있어도 학살의 근원 요인은 결코 될 수 없다. 종교와 이념은 정당성과 동원을 위한 명분과 논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념조차 국가권력의 학살 행위의 정당화의 한 요인을 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빈발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지역의 상당수 세계 시민 전쟁과 대량 학살들은 토착적 책임 못지않게 세계와 국제 사회, 미국과 소련의 발원적 책임이 중요하였다. 대량 학살에서 습속과 문화는 폭력의 매개 체계요 정당화의 요인일 뿐이다. 국가권력의 가공할 위협에 복종하여 학살을 자행하는 수동적 기계 인간과 부품 인간들도 허다하게 양산되었다.

지연된 정의, 정의의 부재, 그리고 완강한 범죄 부인

폭력과 학살의 책임자들에 대한 비처벌과 지연된 정의는 지극히 세계 일반적이었다.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언급하듯 “너무 오래 지연된 정의(justice delayed)는 거부된 정의(justice denied)인 것이다.” 그가 이해하기에 정의 요구에 대해 “기다려라! 기다려라!” 하는 말은 거의 항상 “결코 안 하겠다!”는 말을 뜻했다. 모두 죽는 유한한 인간들에게는 죽은 뒤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정의가 폭력은 아니며 처벌이 보복은 아닐지라도, 체제 전환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일단 체제 전환 이후에는 과연 비극을 그대로 두는 망각과 침묵이 치유일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비극을 끄집어내어 문제를 삼는 것이 치유인가? 후자가 치유 자체는 아니지만 분명 궁극적 치유를 향한 시작일 수는 있다. 인간들이 정의를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용서와 화해의 절대 요청: 생명과 생존의 지속 -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 살아야 한다

비극과 학살이 하나의 인간조건이라면, 비극 이후의 버팀과 견딤 또한 살아 있는 인간들의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 점에서 실존은 인간 생명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비극 이후에도 어떻게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기에 화해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숙명이 아닐 수 없다. 비극이 운명이라면 화해는 숙명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두 조건이다.

용서와 화해는 반드시 불의의 제거 이후에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와 화해가 없다면 우리는 ‘피해’ 이후에도 남은 삶을 ‘피해(자)’가 지배하는 ‘2차 피해’, ‘항구 피해’에 묶여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와 단절하고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파괴한 그 악의 사슬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로부터 용서와 화해의 필요성은 시작된다.

한국의 사유와 담론에 관한 한, 지구 최악의 세계 내전=한국전쟁을 경험한 인간 비극의 정점에 서 있던 우리의 사상과 철학이 과연 과거 우리의 비극을 용서, 화해, 생명, 실존이라는 절대 요청의 관점에서 정면으로 다루었는가? 아니 과거는 고사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을 포함한 지금 우리 현실의 비극은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생명 문제들을 똑바로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상과 학문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지 모른다.

용서와 화해: 제2의 시작, 제2의 탄생

인류는 최근 들어서야 용서와 치유와 화해를 종교와 신앙의 차원으로부터 개인과 사회, 정치와 공동체 차원에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를 국가의 정치와 정책, 정부 구성과 입법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 들어서였다. 인간 학살의 기나긴 역사에 비한다면 인간 공동체 전체 차원의 치유와 화해의 역사는 지극히 짧다는 점에 더욱 놀라게 된다.

용서와 화해는 한나 아렌트의 어법을 따르자면 일종의 시작이요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죽음으로서의 폭력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시 사는 제2의 시작이요 제2의 탄생에 해당된다. 자기를 구하는, 그리하여 자기 삶으로서의 세계를 다시 구하는 기적은 새로운 시작을 이룬 새 자기의 탄생과 불가분 직결된다. 죽음의 상처를 받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폭력과 학살과 적대와 증오의 옛— 자기와 세계를 구할 기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값싼 용서, 값싼 화해, 거짓 화해를 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용서는 지극히 귀하고 비싸다. ‘값싼 은혜(cheap grace)”가 있을 수 없듯, “값싼 용서(cheap forgiveness)”도 없다. 값싼 은혜는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참회가 없는 사죄’다. 그러나 은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값비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서는 인간 정신의 구극처럼 고결하고 고귀한 것이다.

‘값싼 화해(cheap reconciliation)’는 위험하다. ‘값싼 화해’는 불의가 제거 되지 않은 화해이며 정의와 함께 하지 않는 화해를 말한다. 따라서 정의 없는 화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를 서로 대척점에 놓이게 한다.

나아가 거짓 화해(false reconciliation)는 정치인들이 주도하며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진실하지 않았거나, 화해가 자발적이지 않았을 때 화해는 거짓이요 가짜다. 일단 시작된 바른 화해는 궁극적으로 ‘옅은(thin)’ 화해에서 ‘두터운(thick)’ 화해로 나아가야 된다. 입술로 하는 옅은 화해는 화해의 이름을 빈 일종의 회피적 위선일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가슴으로 하는 두터운 사과 없이 두터운 화해는 어렵다. 역사 은폐와 역사 망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책임 기능을 무화하여 어떠한 도덕적 윤리적 장애도 없이 미래에 악행의 재발을 다시 시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권의 문제이자 국가 공동체의 기본 책무에 관한 문제이다.

화해의 요목과 이유들

폭력과 악행의 시대를 지나, 권력과 정의의 역전, 또는 전환 이후 궁극적인 통합적 치유의 도정은 두 가지의 이상적 결합으로 가능하다. 즉 국가적 차원의 처벌과 개인적 차원의 용서, 국가적 차원의 정의와 개인적 차원의 화해가 결합될 때 비로소 가장 바람직한 통합 치유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세계 현실에 비추어 아직 매우 멀다. 아마 진실 규명, 책임자 처벌, 사과와 위로, 재발 방지 체계 마련, 위령과 기념 사업, 트라우마 치료, 배상 및 보상, 화해 교육 등의 여덟 가지 요소들이 잘 배열되고 어우러질 때 마침내 통합 치유(integrated healing/ integral healing)는 가능해질 것이다.

이들이 바로 과거 극복을 통한 과거 통합, 통합 치유를 통한 개인과 공동체 복원의 핵심 요목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또한 내면 치료와 외면 치료, 개인 치유와 사회 치유를 하나로 묶는 필수 단계요 절차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즉 치유가 갖는 전체적 통합적 본질에 비추어 개인 치유와 사회 치유 중의 일부, 또는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통합 치유가 필수불가결한 까닭이다.

치유(healing), 전체(whole), 건강(health)이라는 어휘가 완전히 같은 말(kailo)에서 나온 연유이기도 하다. 치유는 곧 전체—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 한 공동체의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분적 치유나 불균등 치유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치유가 아닌 것이다. 통합 치유만이 제대로 된 치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와 함께 하는 화해: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정의’의 결합

필자는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갈등과 상쟁을 보여온 한국 사회를 향해 오랫동안 보상과 포용, 화해와 상생, 정의와 관용, 유공과 희생의 통합을 말해온 바 있다. ‘국가를 위한 유공’을 더욱 보상하는 일방, ‘국가에 의한 희생’을 더욱 포용하여 ‘유공적 희생’, 또는 ‘희생적 유공’과 같은 동일범주로서 모든 사회적 죽음(social death)들을 하나로 통합해내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말의 실천적 가치와 현실적 법제화는 아직 멀다. 물론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드물다.

그러나 둘을 합칠 수 있을 때 죽음의 통합을 통한 삶의 통합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말을 바꾸면 희생은 유공으로 마침내 함께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럴 때 유공과 희생을 통합하려면 죽음을 초래한 논리를 넘어 보편적 생명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정의가 없는 ‘거짓 화해’와 용서가 없는 ‘항구 피해'’ 모두 넘어서야 한다. 화해를 위해 정의와 용서가 함께 필요한 명백한 이유다. 즉 ‘정의’와 ‘화해’의 결합을 통한 치유와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개인적 치유’와 ‘사회적 치유’가 결합된 ‘통합적 치유’를 말한다. 내면적 치유와 외면적 치유의 결합 역시 통합 치유에 필수적이다. 우리가 피해자들과 함께, 또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정의 있는 화해’를 추구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인적 결단으로 가능한 용서와는 달리 화해는 상대와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치유와 화해를 위해서는 두 차원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용서의 추구이며, 사회적으로는 정의의 실현이다. 전자가 내면적으로 가능한 결단의 차원이라면 후자는 공동체 차원의 치료적 정의, 또는 회복적 정의를 말한다. 보복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가 화해와 상생을 낳는다.

‘개인적’ 용서와 ‘사회적’ 정의의 결합에 진정한 치유와 화해의 길이 있다. 근대 이후 비극이 많았던 한국 사회는 이 숭고한 개인적 집합적 두 정신 상태의 만남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래로부터의 화해

적과 학살자에 대한 제의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의 온 영혼과 온 삶을 교환하며 기도하는 재기(齋祈)의 절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에서 생에의 의지를 추슬러 일어나 감연한 용서를 통해, 함께 일어서자, 함께 살아가자는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내강(內剛)한 모습은 다른 많은 지역과 가해자들의 참회를 불러일으키고 끝내 공동체를 바꾸고 있다. 그들의 이토록 형형(炯炯)한 영혼 덕분에 오늘의 한국과 세계는 그들에게 빚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또렷하게 깨닫는다.

동서를 막론하고 애도와 위무의 표현인 매장과 참배의 예를 적에게 갖춘다는 것은 죽음의 포용을 통해 이생의 갈등을 용서하는 동시에 용서를 빌며, 또 관용하는 동시에 관용받고 싶은 인간의 생명 열망과 화해 열망을 내포한다. 제주, 구림마을, 북아일랜드는 지금 자기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 자기 부모형제를 죽인/죽이려 했던 자들에게 서로 참배하고 서로 제의(祭儀)와 상례를 갖추며, 함께 살아가는 대비약(grand jeté), 즉 대용서와 대관용과 대생명의 장소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으로서 우리는 객관적 엄존성과 미래의 희망적 가능성, 이 둘의 결합 시도를 멈춰선 안 된다. 과거는 지워져서도 안 되지만, 지속해서도 반복해서도 안 된다.

결론 : 정치적 이성을 찾아

이제 우리는 폭력 극복, 또는 폭력과의 동거에 대한 발생 가능한 경로를 예측하게 되었다. 그것은 ① 폭력과 주권 독점을 위한 리바이어던의 길, 절대주권의 확립으로서 가장 일반적이다. ② 타협과 합의, 즉 연합 연방 공존 연립의 길이다. 근대 민주공화국들의 경로다. ③ 일방의 완전 파괴와 패배와 승복이 있다. 주인(지배자)과 노예의 지속, 또는 역전의 길을 말한다. ④ 신, 또는 외부 요소, 세계 요인의 개입과 결정과 동의다. ⑤ 마지막은 폭력대결의 지속이다.

마무리에 앞서 폭력과 정치의 고유한 속성을 제시하기 위한 막스 베버의 명제에 대한 검토는 매우 중요하다. “정치, 즉 권력과 폭력이라는 수단에 관계된 사람은 누구나 사악한 힘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정치 행위에 관한한 선이 꼭 선을 낳거나 악이 꼭 악을 낳는다는 것은 맞지 않으며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매우 중요한 이 문제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세상을 통치하는 정치는 불가피하게 사악한 힘들과의 거래를 피할 수 없다는 점, 둘째 정치가 비록 사악한 힘들과의 거래일지라도 그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현실 정치에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하여 강조하는 까닭이다.

결국 인간을 위한 정치에 필수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지(實踐智, phronēsis/practical wisdom)’, 마키아벨리의 ‘실천적 이성’(prudenzia/prudence), 매디슨의 ‘위대한 공화주의 원칙’, 막스 베버의 ‘열정과 균형감’, 함석헌의 ‘시대의 말씀, 전체의 말씀’, 그리고 이들을 종합한 최장집의 ‘정치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장집에 따르면 정치적 이성은 “정치라는 특별한 인간 행위의 영역에서 상정할 수 있는 길잡이”를 말한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과연 ‘정치적 이성’을 가질 수 있느냐 아니냐에 우리의 삶과 체제가 달려있다. 그것은 결국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 정치가, 혁명가들이 모두 대답하고자 했던 하나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어떻게 인간들은 스스로를 가장 잘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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