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버족(錫伯族)은 시베리아를 만들고, 고려인은 카레이스키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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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버족(錫伯族)은 시베리아를 만들고, 고려인은 카레이스키를 탄생시켰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영어학
  • 승인 2023.05.0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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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 교수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_ 시버족(錫伯族)은 시베리아를 만들고, 고려인은 카레이스키를 탄생시켰다.

 

                                                                        시버족

“Sorrow is shadow to life.”
비애는 인생에 붙어 다니는 것이다.

올 봄에는 그냥 무사히 넘어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예측이 어렵다 못해 불가능에 가깝다. 초속 30m의 괴물 강풍에 나무가 부러지며 전깃줄을 단락(段落)시키면서 전기불꽃이 발생해 산불이 일어날 것을 어떻게 예측하고 무슨 수로 예방을 하겠는가. 유감스러운 화마(火魔)의 출현을 원망한다고 또 다시 이런 변고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내일은 돌풍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가 내리는데, 황사가 섞인 황사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술 더 떠 뉴스 보도는 모레는 고비사막과 중국 내몽골 고원 지역에서 발생한 최악의 황사가 침입할 것이라며 가슴을 미리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 

원래 이민족의 땅으로 중국 측의 기록에 서역(西域)으로 표기되었던 현 신강성(新疆省) 위구르족 자치주의 한 복판에 타림분지가 있고 또 그 안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그곳에 검은 모래바람이 불면 사방은 온통 어둠에 잠긴다. 순식간에 사막의 지형을 바꾸고 사람, 낙타, 말, 물건 가리지 않고 삼켜버린다. 

사막의 길을 가야하는 순례자나 비단이나 환금 가치가 큰 물건을 낙타에 싣고 오아시스 도시를 찾는 대상(隊商)의 무리가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공포의 흑풍(黑風)을 위구르족 등 유목민들은 ‘카라부란’이라고 불렀다. ‘검다’는 뜻의 ‘카라’는 우리말에 들어와서는 ‘가라’가 되었고(용례: 가라ᄆᆞᆯ, 黑馬), 일본에 진출해서는 ‘쿠로’로 정착했다(용례: 쿠로시오, 黑潮). ‘부란’은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반도와 중국 서단 간의 공간적 거리는 멀어도, 언어 문화적으로는 이런 유사성을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일례를 들어, ‘얼룩송아지’, ‘얼룩덜룩(알록달록)’은 돌궐어 ‘알라(ala)’(용례: Ala Too, 얼룩배기[반점] 산맥 adret mottled mountains)와 같은 말이다. 알라투 산맥은 키르기즈 알라투, 키르기즈 산맥, 알렉산더 산맥 등으로 불리는데, 흥미롭게도 기존 고봉의 명칭 또한 새롭게 바뀌었다. 

알라 투 산맥의 최고봉은 해발 4,895m의 세메노프 천산스키 봉(Semenov-Tian-Shansky Peak)이다. 세메노프 천산봉이라는 말이다. 키르기즈어로는 알라뮈뒨 초쿠스(Alamüdün çokusu)라 하는데 문자적으로 알라메딘 봉(Alamedin Peak), 러시아어로는 픽 세메노바 천산스코고(Pik Semonova-Tyan'shanskogo)라고 한다. 

해발 4,860m의 코로나 봉(Korona Peak or Pik Korona)은 문자적 의미가 ‘왕관봉(Crown Peak)’으로, 생김새가 왕관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키르기즈 알라투 산맥에는 또 자유 한국 봉(Free Korea Peak (4,740m)이라는 이름의 고봉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이 산을 픽 스보보드나야 코레야(Pik Svobodnaya Koreya)라고 부르며 북서쪽에 악사이(Ak-Sai) 빙하가 있다. Korea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나라와의 관련성을 의심했으나 그럴만한 전거를 찾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봉(Vladimir Putin Peak)은 해발 고도가 4,446m이며, 러시아어로는 픽 블라디미라 푸티나(Pik Vladimira Putina)라고 불린다. 키르기즈어로는 블라디미르 푸틴 아틴다기 촉구(Vladimir Putin atındagı çoku)라고 한다. 전에는 이름 없는 봉우리였으나 2002년 당시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보리스 옐친 봉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2011년 러시아 연방 최고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이름을 따서 개명을 했다. 이렇게 권세의 변화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서역제국(西域諸國)을 구성하는 종족은 다양하다. 이들이 상황에 따라 북방으로, 바이칼 호수 주변으로 이동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몽골 초원을 떠나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가리아 분지로, 천산 일대로 이주했다. 식량 부족과 기후변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치·군사적 요인에 의한 비자발적 이주가 다수 발생했다. 이런 일로 언어의 혼융이 이뤄지고 사람 간의 혼혈, 사회 문화의 혼성이 생겨났다.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지만 ‘혹한의 땅’으로 불리는 지명 ‘시베리아’(영어로는 싸이버리어 Siberia)는 종족명 ‘席栢(또는 錫伯)’에서 유래하였다. 원어로는 시버(Xibe, Sibe)라고 부르는 석백족(錫伯族)은 15~17세기경에는 현 중국 동북3성 중의 하나인 랴오닝성(遼陽省) 창춘(長春)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의 일파였다. 

랴오닝성의 성도는 심양(瀋陽)이다. 중국어 병음은 센양으로 옛 이름은 봉천(奉天)이다. 이 도시를 만주족은 ‘성경(盛京)’이라는 뜻을 가진 만주어 묵던(Mukden)으로 불렀다. 17세기 초반(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온 후금에 대항하여 명나라, 조선, 여진족이 합세하여 전투를 벌인다. 이른바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에서 승리한 만주족의 누르하치는 선양을 점령한 뒤 1625년 후금의 수도로 정하고, 1634년에는 묵던 즉 성경(盛京)으로 개칭하였다. 나라 이름은 後金에서 淸國으로 바꾼다.

건륭제 때 청나라 조정은 서북 변경의 국경 방어를 목적으로 센양(瀋陽) 일대 15개의 성에 살고 있던 20~40세의 시버족 병사 1,020명과 그 가족 3,275명을 고향에서 4천㎞ 이상 떨어진 신강의 천산북로 일대(준가르 지방)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리 지방에 주둔시키려는 목적에서다. 그때 시버족은 2만호에 달하는 한족 평민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강등시켜 끌고 갔다. 참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그렇게 끌려간 한족 노비들의 후손이 현재는 시버어를 사용하며 시버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만주(滿洲)라는 지명은 동일한 종족명에서 비롯되었다. 

원치 않는 이주는 수많은 비극을 초래했다.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 살던 고려인이라 불리던 우리 민족이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물 설고 낯 설은 땅, 아는 이 한 사람 없는 생면부지의 땅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이들 우리 동족의 후손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에 이르러 한 많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들도 있다. 그곳이 지금은 새로운 전쟁터가 되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명예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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