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우물이 탄생의 별을 쳐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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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우물이 탄생의 별을 쳐다보다
  • 정연식 서울여대 명예교수·국사
  • 승인 2023.04.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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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경주 첨성대의 기원』 (정연식 지음, 주류성, 494쪽, 2023.03)

 

선덕여왕 시절에 세운 경주 첨성대(瞻星臺)는 일반적으로 천문대로 알려져 왔다. 이름을 한자 뜻대로 풀면 ‘별을 쳐다보는 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대설에는 줄기차게 비판이 제기되었다. 올라가는 계단도 없고, 출입구는 중간의 높은 곳에 아주 좁게 뚫려 있고, 발을 디딜 꼭대기 바닥은 평탄치도 않고, 아래 기단부, 중간 창구, 꼭대기 정자석의 방위는 동서남북에 맞춰져 있지도 않으며, 천체 관측에 불리한 낮은 평지에 세워져 있어서 천문대라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천문대설이 불합리하다는 결정적인 예로 첨성대 정자석 바닥 남동쪽 부분에 있는, 너비 약 30cm, 길이 약 60cm, 깊이 48cm의 웅덩이를 들 수 있다(그림 1). 어두운 밤에 하늘을 쳐다보고 활동해야 하는 천문대 바닥에 이렇게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첨성대는 어떤 목적으로 세운 것일까? 선덕여왕은 여자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반감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즉위 초에 여왕의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 첨성대를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 한국, 중국, 일본에는 여인이 햇빛을 받거나, 별빛을 받아 위인을 잉태한 설화들이 있었다. 유화부인이 햇빛을 쬐어 알을 낳았다는 주몽 탄생설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 원효와 자장도 어머니가 별빛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잉태되었다. 그런데 햇빛이나 별빛을 받는 대상이 여인에서 우물로 바뀌기도 했다. 신라 시조 혁거세는 하늘의 별빛이 나정 우물에 비추어 만들어낸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일본에도 위인들이 탄생했다는 탄생정(誕生井) 우물이 여럿이 있다. 우물이 탄생의 상징이 된 것은 형상이 아기가 나오는 산도(産道)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첨성대도 둥근 몸통 부분 위에 우물 난간 형태의 사각 정자석이 2단으로 올려진 우물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한편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자신들이 여타 왕실 사람들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족의 후예라는 것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래서 성골이라는 혈통을 만들어내고, 자신과 왕비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부모와 같은 백정(白淨)과 마야부인으로 하였다. 그래서 우물 첨성대에는 성골 선덕여왕의 시조 석가모니를 낳은 마야부인의 형상이 투영되어 위는 좁고 아래는 엉덩이처럼 불룩하게 만들어졌다. 첨성대 중간의 창구도 출입구가 아니라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를 표현한 것이다(그림 2). 즉 첨성대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의 몸을 합친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첨성대의 모양은 대(臺)라고 하기는 어울리지 않아 예전부터 병 모양이니, 탑 모양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시절에는 우리말에 아직 ‘ㅌ’ 음이 생기지 않아서 胎(태)도 臺(대)와 같이 ‘대’로 읽었다. 그러므로 첨성대(瞻星臺)는 ‘첨성대[瞻星胎]’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사람이 대 위에 올라가 별을 쳐다본 것이 아니라, 우물 모양의 태(胎) 자체가 별을 쳐다본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느 별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에는 ‘별 뜬 산’ 성부산(星浮山)이 있고 그 북쪽 율동에는 ‘별 바라보는 산’ 망성산(望星山)이 있다(그림 3A). 망성산에서 성부산을 바라보면 성부산의 세 봉우리가 오른편으로 점점 높아진다(그림 4A). 세 봉우리는 오리온자리 삼태성(三太星)의 모습을 하고 있다(그림 5). ‘삼’은 ‘삼신할머니’에도 보이듯이 태(胎)를 가리키는 말이고, 胎는 太와 음이 같다. 그러므로 삼태성은 탄생의 별이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죽은 지 2년 뒤에 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관이 나정을 향한 방향에 바로 성부산이 있었다(그림 3B). 나정에서도 성부산을 바라보면 보갓산, 성부산, 망성산으로 구성된,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세 봉우리가 보인다(그림 4B). 나정에 빛을 내려 박혁거세가 태어나게 한 별도 삼태성인 것이다. 결국 첨성대는 탄생의 별 삼태성을 쳐다보는 우물이다. 

그리고 나정을 발굴 조사해 보니, 시조묘의 나정 앞쪽에는 다섯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나정의 북쪽에서 구덩이와 성부산을 바라보며 오른쪽부터 구덩이에 번호를 붙이면 구덩이의 간격이 1~2, 2~3, 3~4는 비슷하고 4~5는 매우 넓다. 이 배치는 경주 서악동의 무열왕릉과 그 위쪽의 거대한 봉분 4개나, 신라 종묘에 별의 상징으로 항아리 다섯을 묻은 구덩이에도 나타나며, 그것은 하늘의 제왕 북극오성(北極五星)의 배치와 일치한다(그림 6). 따라서 나정 우물에 북극오성의 정기를 담은 삼태성의 별빛이 내려 박혁거세가 태어난 것이다. 

선덕여왕 시절에는 여러 차례 여왕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건축사업을 벌였다. 여왕이 즉위한 이듬해 633년에 첨성대를 세우고, 634년에는 여왕은 향기롭다는 분황사(芬皇寺)를 세우고, 그 이듬해에 여왕은 영험하고 신묘하다는 영묘사(靈妙寺)를 세웠으며, 645년에는 여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웠다. 즉위한 이듬해의 첨성대 축조도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9층탑과 같이 여왕의 권위와 관련된 이미지 만들기의 일환이었다. 선덕여왕의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의 신성성을 겸비한 여왕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첨성대를 세운 것이다. 


정연식 서울여대 명예교수·국사

서울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학회 회장,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전문위원,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전문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사회경제사, 일상생활사, 과학기술사, 고천문학, 역사 음운학, 지명학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저서로는 『영조 대의 양역정책과 균역법』,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 2),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의 우리말 이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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