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저항하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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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저항하는 여성이다!
  • 도서출판 갈무리
  • 승인 2023.04.2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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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제의 책_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신지영·김정연·김예나·문현 옮김, 갈무리, 224쪽, 2023.03)

 

우리는 마녀사냥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한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이 급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가 확산되면서 증가해 왔다.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 책에서 여성 폭력이 증가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이 여성과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과 “신세계”에서 벌어진 마녀사냥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성에 대해서 전개되고 있는 전쟁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축적의 구조적 요소이다. 이 전쟁은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재생산 수단을 파괴하는 것을 토대로 한다. 자본주의 태동기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이면에서 우리는 인클로저, 토지 강탈, 그리고 여성의 재생산 활동과 주체성이 다시 주조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페데리치는 이 책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봉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여성이 피해자화에 저항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며,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이 현재의 투쟁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전재한다.


마녀는 국가, 자본, 교회에 의한 여성 학살의 피해자였다

15~17세기 유럽과 신세계의 마녀사냥에 대해서 지금까지 적절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 왔는가? 우리는 당시 학살당한 마녀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당시 유럽과 신세계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주된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부분이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째서인지 마녀사냥이 언급될 때 그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였다는 사실은 누락되거나 성별 중립적인 언어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가 유포하는 ‘마녀’(witch)의 형상은 매부리코의 사납고 시기심이 가득한 나이 든 여성의 모습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의 유명한 마녀재판 발생지에서는 상점마다 어김없이 매부리코의 음산한 마녀의 모습을 새긴 기념품을 판매한다. 페데리치는 이러한 유해한 관광 상품들의 판매는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녀들이 학살의 피해자임에도 전 세계에서 적나라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마녀사냥에 대한 역사 이해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마녀사냥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사유해야 할 필요는 여기에 있다고 페데리치는 말한다.

이 책의 1장에 수록된 「한여름의 노래」는 마녀사냥이 대중문화의 일부로 편입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마크에는 매년 ‘성 요한 탄신일’ 하루 전날(6월 23일) 모닥불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축제 전통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때 모닥불 위에 (마치 마녀를 화형하듯이) 짚이나 나무로 만든 마녀의 인형을 올려놓고 태운다는 것이다. 「한여름의 노래」의 가사에는 마녀의 색출을 기뻐하는 내용이 있다. “모든 마을에는 그 마을의 마녀가 있어요 … 기쁨의 불로서 그들이 살지 못하게 할 거예요.” 덴마크의 페미니스트 그룹들은 이 노래를 개사하고 노래의 여성혐오적 성격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페데리치는 이와 같은 마녀 인형 화형식이 특히 유럽의 극우 집단들을 중심으로 유희로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페데리치는 우리가 마녀들의 참화가 반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마녀들의 역사에 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마녀는 사회적 불의에 분노하며 저항하는 여성이었다

이 책의 제목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는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의 시위 현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구호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이 마녀라는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데리치는 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마녀라는 형상을 교회와 국가에 대한 여성 반란의 사례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녀는 저항하는 여성이었다. 

이 책에서는 인클로저(enclosure)가 마녀사냥의 사회적 배경 중 하나라는 점이 강조된다. 중세에 평민들은 공유지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공동체주의적 농업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5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농업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어난 인클로저는 잉글랜드 전역에서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 토지를 사유화하는 운동이었다. 페데리치는 “토지 매·독점, 소작료 폭등, 새로운 과세 명목” 등이 모두 인클로저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인클로저로 많은 평민이 생존수단을 빼앗겼고 그동안 누려왔던 관습권을 박탈당한 여성들이 특히 빈곤해졌다. 마녀사냥의 희생자 다수가 혼자 사는 가난하고 나이 든 여성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마녀들은 자주 악마와 교통했다는 혐의로 박해받았는데, 전형적인 마녀 고발 서사에 따르면, 빈곤한 여성에게 악마가 나타나 나의 노예가 되면 그 대가로 돈과 음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공동체적 농업의 해체, 화폐 경제의 부상, 토지 강탈로 사회적 권한을 가장 크게 빼앗긴 집단이 여성이었고 가난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저항했다. 여성은 공유지의 인클로저에 맞서는 많은 저항 행동에 참여했고 공유지를 에워싼 말뚝을 뽑아내기도 했다. 또 마녀는 여러 주술을 행하는 민간 치유자였고, 산파와 약초 치료사 등으로 일하면서 마을에서 인기 있는 여성이었다. 마녀사냥이 일어난 시기는 인클로저에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민중 저항이 폭발하는 시기였다. 이때 마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인 마녀를 공격함으로써 당국은 “사유재산에 대한 공격, 사회적 불복종과 반항, 마법의 보급 전파”를, 그리고 “성행위와 출산을 국가의 지배하에 두는 성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동시에 처벌했다고 페데리치는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여성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페데리치는 자본주의가 마녀사냥 즉 ‘여성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녀사냥의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마녀사냥이 파괴한 것은 여성의 신체뿐인가? 페데리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여성을 ‘마녀’로 지목하고 박해하는 것은 유럽 여성을 무급 가사노동에 구속하는 길을 닦았으며, 국가에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고 새로운 노동자 세대의 생성을 보장했다. 아울러 수백 년간 수십만 명의 마녀들의 처형과 함께 파괴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방해가 되는 여성 주체와 실천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 전체였다.

여성과 남성이 자본주의 이전까지 공유지를 중심으로 협력하며 살아온 다양한 방식들을 마녀사냥은 파괴했다. 또 마녀사냥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마녀 고발에 협조하고 남성에게 복종하는 여성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임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조성함으로써 여성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등 돌리게 하는 방식으로 여성들의 관계성도 파괴하였다. ‘가십’이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가 이 점을 보여 준다. 5장 「‘가십’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페데리치는 ‘여성 간의 우정’ 또는 ‘여성 친구’를 의미했던 ‘가십’이 마녀사냥, 인클로저, 자본주의의 부상, 여성 사회적 지위의 격하와 함께 한가한 여성들이나 하는 영양가 없는 수다라는 뜻으로 변화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은 하나의 구체적인 질서 즉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구성하였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필요했고 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여성이 필요했다. 땅이 없고, 생산수단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임금 노동자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야 했고, 여자들은 사회적 발언권과 영향력을 박탈해 집안으로 몰아넣고 무급 가사노동과 출산에 평생 복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마녀사냥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부상하는 길을 열어젖힌 다양한 사회적 과정의 교차점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페데리치의 일관된 관점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페데리치는 이 책의 6장과 7장에서 최근 몇 년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인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폭력의 현황을 전한다.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에서 멕시코 국경을 넘어 위치한 곳인 후아레스시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수백 명의 여성이 사라졌고 그들의 훼손된 신체는 종종 공공장소에서 유기된 채 발견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여성 납치와 살인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라틴아메리카의 무장단체들은 400여 년 전의 마녀사냥이 그러했던 것처럼 극악한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에 고문을 하고, 그것을 전시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한다.

아프리카에서는 1980년대 이후 젊은 남성으로 구성된 자경단 무리가 징벌적인 토벌을 하러 다니면서 마녀사냥을 하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마녀 박해로 인한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정부가 이 문제의 진상을 규명할 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북부 가나에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거나 살해 위협을 받고 피신한 여성 3천여 명이 모여 있는 ‘마녀 수용소’가 있다. 가나에서는 마녀의 활동 방식과 색출 방식을 설명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날마다 방영되며, 마녀를 잡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영상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6~17세기의 마녀사냥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마녀사냥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난폭하게 공격당하는 이들은 가난하고, 나이 든 여성들이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아프리카 마녀사냥의 실태를 전달하고 있다.

 
마녀사냥은 왜?

페데리치에 따르면 자본주의 태동기의 마녀사냥과 오늘날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서 우리는 많은 동일한 원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페데리치는 400년 전에 일어난 마녀사냥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이 발생하는 배경에 토지 분쟁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다이아몬드, 콜탄, 구리 광산 지역의 무장단체가 여성의 질에 총을 쏘고, 과테말라의 군인이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찢어 개복하는 일은 ‘반게릴라 전쟁’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반게릴라 전쟁의 효과로 그 지역의 공동체들은 파괴되고, 선주민들이 떠난 땅을 차지하는 것은 국제기구와 정부들의 비호를 받는 광업 기업, 농산업 기업이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새로운 형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과정의 효과이다. 여기에서 페데리치가 말하는 지구화란 “자본이 이 세계의 자연자원과 인간노동에 대한 압도적인 통제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재식민화 과정”이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많은 학자가 역사적 맥락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럽의 마녀사냥을 아프리카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마녀사냥의 전례로 인정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아프리카의 새로운 마녀사냥도 ‘시초축적’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끝나지 않은 시초축적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자기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새로운 재산 관계와 새로운 가치 창출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공동체적 연대감이 경제적 갈등의 영향 아래 파괴”된다. 그리고 이것이 마녀사냥 발생의 배경이 된다.

 

공통장을 구성하는 페미니스트 봉기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강력범죄(살인, 강도, 방화, 강간·강제추행 등) 사건 12만 3,810건 중에서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이 88.1%(10만 9,133건)이다. 또 유엔이 제공하는 통계에 따르면 2021년에 약 81,000명의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중에서 45,000여 명의 여성이 친밀한 파트너나 가족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는 평균 1시간에 5명의 여성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매우 보수적인 추정치로 인정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여성살해(페미사이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기 시작했지만 2022년에도 학교 안, 지하철 화장실, 대낮 길거리에서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여성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정 내외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살해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한국도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여성들은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법적 처벌 강화 요구는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 당국에 더 많은 권력을 실어줄 뿐”이기에 종종 “출구 없는 해결책”처럼 느껴진다. 페데리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부가 축적되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이 ‘잡아먹히지’ 않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 건설될 때에만 종식될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여성 운동이 지금까지 축적해온 다양한 행동의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 당국이 아니라 사용자 여성들이 운영하는 대피소를 여는 것, 자기방어 수업을 개설하는 것, 1970년대에 시작된 밤길 되찾기 시위나 강간과 지참금 살인에 저항하는 인도의 여성 시위” 등이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우리가 대안을 구성할 때 마녀사냥은 언제나 공동체 관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클로저는 토지에 울타리를 둘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이에 벽을 설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클로저 이후 “호혜적 유대가 특징이었던 공동체들은 극심한 양극화를 겪게” 되었고, 그전까지 공유지에서 함께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 사이에 적개심이 커졌다. 마녀사냥은 자본주의가 노동하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이 이 책에서도 강조된다. 특히 여성이 공동체와 맺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여성이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고 페데리치는 설명한다. 일례로 여성은 역사적으로 공동체의 집합적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자본주의는 새로운 노동질서를 부과하기 위해 그전까지의 사회적 관계와 지식의 세계 전체를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이 세계자원과 인간노동에 대한 압도적 통제권을 누리면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재식민화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재생산을 직접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폭력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벤처기업의 거점이 되고 반식민지적 투쟁이 가장 강력하게 전개된 지역에서 극심해졌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특히 라틴아메리카 같은 곳에서 여성들, 특히 농촌 여성이나 나이 든 여성이 너무 잔혹한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녀들에게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공동체적 관계를 만들고 수호할 수 있는 통제 불가능한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동체 혹은 공통장(commons)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한다면, 가해자들에 대한 더 엄격한 처벌만이 아니라 평등한 공통장의 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필요하다. 또 페데리치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이 각국 정부에서부터 유엔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위한 공간을 창출해 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경제적 지구화의 직격탄을 맞은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같은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도 같은 곳에서 공동체의 재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아프리카에서 쓸모없고 악마적인 존재라고 사냥당하는 나이 든 여성들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 권력의 구축과 연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비서구 활동들인 <비아 깜뻬씨나>,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과 사빠띠스따의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페데리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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