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 – 아이유, 용서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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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 – 아이유, 용서를 노래하다
  • 김광식 서울대·인지문화철학
  • 승인 2023.04.23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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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철학 사이〉

■ 김광식 교수의 〈음악과 철학 사이〉

 

 

[리뷰] 데리다의 <용서하다>로 본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


“정말 넌 다 잊었더라 / 반갑게 날 보는 너의 얼굴 보니
그제야 어렴풋이 아파오더라 / 새 살 차오르지 못한 상처가 (....) 

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 차라리 다 울어둘 걸

그때 이미 나라는 건 네겐 끝이었다는 건
나만 몰랐었던 이야기”


아이유가 부른 이별 노래 <나만 몰랐던 이야기>다. <안나 카레니나>도 이별 이야기다. 매력 넘치는 안나 카레니나는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아들과 자상한 남편을 버리고 연인과 외국으로 떠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안나는 사랑에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브론스키는 벗어나고 싶어 한다. 결국 그는 러시아로 혼자 돌아온다. 모든 것을 버렸던 안나는 사랑마저 잃게 되자 기차에 몸을 던진다.

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다. 이별은 모두에게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과 자상한 남편을 떠나는 순간, 그때 이미 그녀라는 건 그들에겐 끝이었다. 그녀가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는 순간, 그때 이미 용서[받을 기회]라는 건 그에겐 끝이었다. 그녀만 몰랐던 이야기였을 뿐.

좋은 이별이란 결국 좋은 용서다. 좋은 이별이란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마저 용서하는 거다. 하지만 좋은 이별이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다. 좋은 용서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니까. 용서하고 다 잊은 듯해도 정말 다 잊은 듯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렴풋이 아파온다. 새 살 차오르지 못한 상처가. 

1960년대 프랑스에서는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공소 시효를 없애는 법안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나치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프랑스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그의 책 <시효 없음>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독재체제에서 흑인에 대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사면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흑인 지도자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자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범죄를 증언하는 이는 사면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찾아 용서에 대해 강연을 했다. 데리다는 그 강연을 정리한 책 <용서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장켈레비치의 분노에 찬 정의로운 선언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음’을 ‘시효 없음’과 구분한다. 나치의 범죄나 아파르트헤이트 독재체제의 범죄는 뉘우치고 또 뉘우치고 영원히 뉘우쳐야 한다. 어떤 처벌이나 배상이나 속죄로도 끝이 있을 수 없다.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용서가 불가능해 보이는 곳 (...) 바로 그곳에서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요? 용서할 수 없는 것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 데리다, <용서하다>

이러한 무조건적 용서는 용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집는다.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때 비로소 용서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이러한 조건적 용서는 주고받는 ‘거래’이지 참된 의미의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용서해 ‘주는 것’이다. 용서는 본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선물’이다. ‘용서하다’는 프랑스어로 기부(donation)라는 뜻이 있는 ‘파도네(pardonner)’이고, 영어로 주다(give)라는 뜻이 있는 ‘포기브(forgive)’이며, 독일어로 주다(geben)라는 뜻이 있는 ‘푀어게벤(vergeben)’이다. 

용서는 사랑이다. 참된 의미의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랑할만한 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해 주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4월은 잔인한 계절이다.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 때문이다. 수많은 죄 없는 어린 청춘들이 차디찬 바닷속에 가라앉아 돌아오지 못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지만 침몰한 진실은 9년이 지나도 아직도 구조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서해야 할까, 아니 용서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이나 슬픔을 함께 하는 이는 커다란 슬픔을 넘어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과 우리가 생명보다 돈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탓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서를 빌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9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은 서서히 잊히고 있다. 이런 우리를 용서해야 할까, 아니 용서할 수 있을까?

그들이든 우리든 뉘우치고 또 뉘우치고 영원히 뉘우쳐야 한다. 뉘우침에 시효는 없다. 진실도 끝까지 밝혀야 한다. 책임도 끝까지 물어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데 시효는 없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아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까 용서할 수 있다. 그게 용서니까. 용서는 본래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좋은 용서란 거, 결국은 세상엔 없는 일이다. 다 잊은 듯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 잊은 듯했던 새 살 차오르지 못한 상처를 품은 가슴 한편이 어렴풋이 아파온다. 그때 이미 나의 용서라는 건 내겐 끝이었다. 나만 몰랐던 이야기였을 뿐. 그걸 알았다면 그때 차라리 다 말해둘 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그럼에도 용기 내어 마음을 고쳐 먹어본다. 어차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좋은 용서란 거, 한 번 해볼까? 그럼에도 어느새 다시 어렴풋이 잊은 듯했던 상처가 아파온다. 그럼에도 ...... 그럼에도 ......

“좋은 [용서]란 거, 결국 세상엔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 차라리 다 [말해]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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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김광식 서울대·인지문화철학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공과대학 과학·기술·철학과에서 인지문화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기초교육원에서 교양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인지과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인지철학자이자, 여러 문화현상의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문화철학자이다. 저서로 『BTS와 철학하기』, 『행동지식』, 『김광석과 철학하기』, 『다시 민주주의다』(공저),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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