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첫 번째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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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첫 번째 러브레터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0.03.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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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8.6~1934.12.24)이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인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이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8.6~1934.12.24)이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인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이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일교차 큰 날씨, 잘 지내고 계신지요?
편지 한번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봄이면 유난히 편지를 드리고 싶어 온 몸과 마음이 열병을 앓았지요. 특히 진달래꽃이 세상을 물들일 때쯤이면 몽유병 앓듯 밤이 주는 평온함마저 거스르기가 일쑤였지요. 그러나 차마 편지 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제 편지를 받고 혹 부담스러워 하실까 저어되기도 했고요.

오늘은 무릅쓰고 편지를 씁니다. 이 땅에 진달래 소식이 도착하려면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는데, 춘래불사춘이라, 그래서 그런지, 왠지 마음이 앞서고 바빠지네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당신이고, 그래서 「진달래꽃」은 제가 알게 된 첫 번째 시입니다(물론 동시를 제외하고요). 진달래꽃의 다른 말이 참꽃이라고도 일러주셨는데, 왠지 ‘참’자가 들어가는 꽃이어서 그 어떤 꽃보다도 귀하게 여겨졌더랬습니다. 이후 살펴보니, 진달래꽃, 참꽃을 대상으로 시를 쓴 시인들이 그리 많이 없더군요. 당신에게 누가 되겠거니, 그리 짐작합니다.

이제 곧 80대로 접어드는 엄마는 여전히 지금도 당신을 최고의 시인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꽤 오래 전, 그 이유를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엄마의 대답, 당신의 시에서 따뜻한 온도가 느껴진다고. 그 말씀은 어느덧 제가 평생 시를 안고 살아가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비단 제 엄마뿐만 아니라 당신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기도 하지요.

저는 인기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기 많은 사람은 굳이 제가 거들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유행을 따르는 것 같아 개성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이왕이면 생색나는 쪽으로 마음을 주자, 뭐, 그런 입장이지요. 고백하면, 처음에는 인기 대단히 많은 당신에게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그래서 별 관심이 없었고요. 여기저기서 당신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와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습니다. 아, 좀 더 솔직히 고백하면, 비유와 상징으로 제 마음을 사로잡는 현란한 작품들이 넘쳐나서 당신에게 마음 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맑고 투명한 감성과 친숙한 언어로 쓰여진 당신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여겨졌기에 마음이 덜 갔던 것이라, 그리 정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이 오래 오래 머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철이 들고 깨달았습니다. 사전을 굳이 뒤적이지 않아도 마음에 턱턱 꽂히는 말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친근한 우리말로 당신은 시를 썼지요. 나아가 사람살이의 일들을 내밀하고도 섬세하게 그 틀과 결을 어루만져 주었지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일깨워준 그 귀한 향기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제 편협한 안목이 겸연쩍기도 했습니다.

관념의 틀에서 슬슬 무장 해제되어 가던 무렵 만난 당신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무척 슬퍼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그 슬픔에 별 공감되질 않았는데, 당신이 끝없이 펼치는, 눈매 깊어지는 영롱한 슬픔의 강을 불현듯 맞닥뜨리게 된 그날. 이는 순전히 시 「엄마야 누나야」 덕분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시는 그 시작이 노래라지요? 노래 가사로 시가 지어졌다는 사실을 「시론」 수업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렇지요, 시는 노래가 되어야 진정 시맛이 나지요. 어릴 적 수없이 불렀고 들었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노래가 한참 어른이 된 후에서야 새삼스럽게 소환되다니요. 순간 얼마나 당혹스럽던지요. 단조의 단조로운 멜로디가 결코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벅찬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울컥, 했던 순간도 참으로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가 곧 노래’라는 기본 원리를 새삼 일깨워준 당신, 사랑합니다.

「엄마야 누나야」를 재발견한 이후 저는 당신의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127편의 작품들을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지껏 필사한 그 어느 시집보다 공을 많이 들였더랬습니다. 표현 그대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으면서 제 마음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 여백의 흐름을 따라 유영했더랬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당신이 무척 그리워졌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봅니다. 당신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 비록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답장을 굳이 바라지는 않습니다만. 아주 오래 전 첫 시집을 내고 여태껏 두 번째 시집을 묶질 못 하고 있는 제가 안타까워 혹여라도 당신이 답장을 주신다면, 두 번째 시집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첫 번째 러브레터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단박에 보이는 얼굴 표정에만 감정을 가두지 않고, 우리네 삶 여기저기 속속들이, 선하고 깊은 표정을 기꺼이 흩뿌리는 당신이 많이 그립습니다. 앞모습뿐만 아니라 뒷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당신이 이 봄에 많이 그립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당신 무덤 위엔, 곧 진달래꽃이 무성하겠지요. 진달래꽃말이 사랑의 기쁨이라는데요. 지루하고 두터운 겨울의 무게를 벗고 이번 봄에는 이 세상에 뿌리 내리고 있는 모든 이들이 사랑의 기쁨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금 본의 아니게 온통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자리가 다들 환해졌으면 합니다.

곧 만나게 될 진달래꽃 소식으로 당신 안부를 확인하겠습니다.
변함없는 제 사랑을 받으시면서 진달래꽃으로 내내 그리 계시길.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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