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서 살고 있는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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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서 살고 있는 지식인들
  • 박선미 인하대학교·사회과교육
  • 승인 2023.04.09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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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 선장은 하늘을 나는 섬인 라퓨타를 방문한다. 이곳 사람들은 머리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눈도 하나는 깊숙이 틀어박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위로 올라가 있다. 늘 깊은 사색에 사로잡혀 듣거나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시종이 공기주머니로 사람의 입과 듣는 귀를 부드럽게 두드려 깨워줘야 대화할 수 있다. 가끔 눈도 두드려주어야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면할 수 있다. 라퓨타에서는 사색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들을 학식이 형편없는 저급한 사람이라며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한다. 이들은 사색 이외에 다른 현실적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심지어 천박하게 여긴다. 정신과 마음이 온통 사색에 사로잡혀 다른 일에 무관심하므로 의견을 갖는 경우가 드물다.

대학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외교 참사를 규탄하는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속한 대학도 한일정상회담에서 보인 굴종 외교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발표하기 전 성명 참여 의사를 묻는 온라인 공간에서 우려와 지지를 표하는 의견이 오갔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서문과 제27조를 근거로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지지하는 의견과 성명서 발표가 정쟁의 불쏘시개로 사용되어 교수집단의 신뢰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일 청구권협정,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과 같은 자료를 올려주는 이도 있었고, 협정이나 대법원 판결의 효력 해석이 본질이 아니라 국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독단적으로 제3자 변제 방안을 결정한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침묵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침묵이 무관심을 뜻하는지, 혹은 말없는 지지 혹은 반대를 의미하는 지 알 수 없다.

대학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토론과 믿음이 있었던 1980년대는 낭만의 시대였다. 대학은 오랫동안 자연과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지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사회 변화를 추동해 왔고, 개인의 목적과 사회의 목적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삶을 준비시키는 교육을 담당해왔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필독서처럼 읽었다. 대학생이었던 필자도 지식인의 역할 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지식인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차에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지만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당시 대학에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사회 변혁을 이끄는 교수들도 있었고, 의견과 주장으로 시끌벅적했던 공론장도 형성되었다.

점차 시장이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보편 담론을 만들고 대중을 이끄는 대변자로서 지식인의 역할은 위축되었다. 되풀이되는 평가와 측정의 압박 속에서 더 열심히 생산성과 영향력 지표를 충족하기 위해 안달을 부려야 하는 ‘꿈의 대학에서 근무하는 교수들’에게 현실의 문제에 의견을 가지거나 관심을 보내는 것조차 사치인 시대가 되었다. 교수들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와 기술 변화를 따라가고, 대학과 학과가 제공한 혜택의 빚을 갚기 위해 표준화된 논문이나 보고서를 제출하느라 분주하고 정신없다. 한가롭게 긴 호흡의 인문학 저서를 집필하거나 라틴어 고전을 번역하는 이는 무시된다. 교수들은 더 이상 사회 현안에 대한 관심을 둘 여유가 없고, 공공자금의 분배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해 대학이 받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염려하여 목소리를 자기 안에 가두어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편 담론은 격렬한 비판과 도전으로 그 권위와 정당성이 빠르게 축소되었고, 지식인은 특정 영역의 전문가로 분열되었으며 위대한 학자들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대중은 더 이상 지식 획득을 위해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권력체계의 대리인을 자처해 온 자칭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불안과 공포에 길들여지고 있다. 진리가 의견으로 치부되고, 거짓이 참으로 뒤바꿔지는 권력의 폭력성을 무기력하게 목도하는 횟수가 더할수록 불안과 공포도 커져갔다. 기억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의 존재를 지속시키거나 연장하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기억은 작고 힘없는 자들의 도구인 반면, 망각은 크고 힘 있는 자들의 이익에 봉사한다. 지식인들은 하늘을 나는 섬에서 내려와 누가 일을 저지른 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기억하고 다른 이들과 대화해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근대적 약속은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소통할 때 비로소 소환될 것이다.
      

박선미 인하대학교·사회과교육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지역 공간에 내포된 불공정한 구조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대표저서: 『빈곤의 연대기』, 『전염병의 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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