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sugar)의 고향은 인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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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sugar)의 고향은 인도이어라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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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10)_ 설탕(sugar)의 고향은 인도이어라

“고향에서의 본명은 샤르까라(śarkarā), 팔려간 아랍에서는 수까르(sukkar)라 불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불안하고 두렵고 우울한 겨울을 보냈다. 이제 곧 茶의 계절이다. 곡우(穀雨) 전 어린 찻잎을 따서 덖음 방식으로 만든 우전차(雨前茶)의 배릿한 맛과 아련한 향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황혼이 물든 듯 홍갈색 빛깔 고운 홍차도 즐겨 마신다. 밥 취향 다르듯,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레몬 띄운 홍차 맛에 반하기도 한다. 설탕 넉넉히 넣어 새콤 달달해진 홍차는 피로를 풀기에 좋다. 

우리나라에서 한자어 茶의 발음은 ‘차’와 ‘다’ 두 가지다. 이 둘을 용케 구별해 쓰는 사람들의 언어 사용 능력이 놀랍다. ‘차’를 마신다고 하지 ‘다’를 마신다고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렇듯 사람들은 유한한 언어 경험을 가지고 차를 덖다, 차를 우리다, 다방, 찻집, 다도, 차례, 헌다례, 찻잔, 다실, 찻그릇, 다구, 차 맛 등의 표현을 실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골라 쓴다.

▲ 카이로 길가 커피가게(ahwa). 사람들은 이곳에서 차나 커피를 마시고 시샤(shisha)라 불리는 물담배를 피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담소를 즐긴다.사진 출처: https://cleolingo.com/how-to-order-at-an-egyptian-ahwa/
▲ 카이로 길가 커피가게(ahwa). 사람들은 이곳에서 차나 커피를 마시고 시샤(shisha)라 불리는 물담배를 피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담소를 즐긴다.사진 출처: https://cleolingo.com/how-to-order-at-an-egyptian-ahwa/

茶라는 용어가 서방의 유럽으로 전해져서 오늘날의 영어 어휘 tea가 생겨났고, 서역제국(西域諸國)을 거쳐 인도, 페르시아, 아랍을 지나 이집트에 이르러서는 shay, chay 또는 sheye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런 차이는 茶의 중국어 발음 중 어떤 변이형을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발생했다. 성조는 무시하고 본다면 茶 발음의 양대 변이형은 오늘날 표준 중국어로 쓰이는 만다린(Mandarin, 베이징 官話)과 광동어의 cha와 복건성 지역에서 쓰이는 민남어(閩南語)로는 te~ta다. 결국 중국 어느 지역에서 어떤 방언 사용자와 접촉했느냐에 따라 차용된 발음과 어형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두 발음이 다 유입되었다. 그래서 “차를 마시러 다방에 간다”라는 문장에서처럼 동일한 한자 茶를 놓고 어느 때는 ‘차’, 또 어느 경우는 ‘다’라고 읽을 줄 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새로운 언어와 접촉하면서 가장 손쉽게 일어나는 어휘 차용은 여러 경로로 이루어진다. 국경 지대에서 교역이 이루어지던 장소인 호시(互市)에서 이방인이 이방인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또는 포교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고 정복자의 언어를 피정복민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또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화라는 폭력의 역사를 통해, 그밖에 과거의 강제 이주와 노예무역, 근래의 자발적 이민, 비운의 전쟁 포로의 적응 과정 등에서 끊임없이 어휘와 문법 차용이 계속되어 왔다.

지금은 설탕이 흔해서 음식이고 차에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넣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단맛을 내는데 꿀이 사용되었다. 설탕에 해당하는 영어 sugar는 원산지 인도에서 수입된 단어다. 그런데 고대 실크로드 상의 주요한 서역 도시 쿠처(龜玆)에서 설탕이란 말을 놓고 소통이 안 돼 애를 먹은 적이 있다. 큰 딸아이가 장 경련이 일어나 설탕물이라도 타 먹이려고 호텔 직원에게 설탕을 좀 구해달라니 sugar라는 말을 알아듣지를 못했다. 우리말 설탕도 안 통하고, 심지어는 한자어 雪糖/xue tang/도 못 알아듣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침내 눈 雪자를 빼고 糖만을 써서 /tang/이라고 하니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어에서는 lollipop 같은 candy를 사탕(沙糖)이 아니라 봉봉당(棒棒糖 bàngbàngtáng)이라고 하고, 설탕을 雪糖이 아니라 ‘가루 설(屑)’을 써서 屑糖(xie tang)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냥 당(糖)이라고 하거나 식당(食糖), 사당(砂糖), 백사당(白砂糖), 홍당(紅糖) 같은 말을 사용한다.

전에는 <지리상의 발견> 운운하던 서양학자들이 중세와 근세를 구별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해낸 용어가 <대항해시대>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아시아는 문명이고 유럽은 비문명 지역이었다. 모든 물산이 풍부한 부자나라 중국과 황금 등 온갖 재화가 넘쳐나는 인도는 서양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서남해안의 캘리컷 일대에서 구입한 후추를 가지고 돌아가 엄청난 판매 수익을 올렸다. 당시 후추 1g은 금 1g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

설탕이라는 첨미(甜味, 단맛) 식품을 접한 아랍, 페르시아, 유럽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단맛에 중독되어갔다. 쓴 커피를 마실 때 설탕을 넣어야 하고, 마카롱, 쿠키,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만들 때 설탕은 필수였다. 아이스크림에 설탕이 빠지는 건 앙꼬 없는 찐빵 격이었다. 설탕을 많이 넣을수록 맛있고 품질 좋은 식품으로 대접받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도시 피렌체의 발전을 얘기할 때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집안의 카테리나라는 여인이 불과 14세 나이에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을 갔다. 둘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나 문화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카테리나 덕분에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다. 결혼식 날 하이힐을 신고, 포크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파리지앵들에게 포크 사용법을 전수하고, 발레를 들여온 인물이 바로 카테리나였다. 웨딩 리셉션(피로연)에서 하객 접대용으로 인기 있는 셔벗[샤베트]의 탄생도 카테리나가 있어 가능했다.

▲ 영화 〈디안느(Diane)〉의 한 장면. 앙리 2세와 연인 디안느, 그리고 카테리나 드 메디치. 앙리2세가 카테리나와 결혼 전부터 사귀어온 디안느는 앙리보다 20세 연상이었다.
▲ 영화 〈디안느(Diane)〉의 한 장면. 앙리 2세와 연인 디안느, 그리고 카테리나 드 메디치. 앙리2세가 카테리나와 결혼 전부터 사귀어온 디안느는 앙리보다 20세 연상이었다.

언어 차용의 측면에서 설탕을 뜻하는 영어 어휘 sugar가 등장하기까지 그 기원과 과정을 살피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멀고도 긴 작업을 필요로 한다. 차용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닐뿐더러, 공간적으로도 먼 길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설탕(屑糖·雪糖)은 열대·아열대 지방에서 재배되는 사탕(沙糖)수수나 냉대·온대 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는 사탕무에서 얻은 원당을 정제공장에 투입하여 만든 천연 감미료로, 수크로스(sucrose) 또는 사카로스(saccharose)라고 하는 자당(蔗糖)을 주성분으로 한다.

설탕은 인도에서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산량이 많지도 않았고 가격도 비쌌다.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도 설탕은 없었다. 때문에 국제적 교역이 이뤄지기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천연 꿀이 사용되고 있었다. 인도 정복 전쟁 중에 처음 설탕을 접한 알렉산더대왕은 꿀과는 다른 단맛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알렉산더와 그리스 병사들이 접한 인도어는 범어 Sharkara였는데, 발음은 마치 saccharum처럼 들렸던 듯하다.

사실 전자는 설탕을, 후자는 사탕수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인공 감미료’를 뜻하는 말로 영어에서 빌려 쓴 사카린(saccharine)은 바로 범어 saccharum으로부터 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씹어서 당분을 섭취했다. 서기 5세기경 굽타왕조 때의 인도에서 사탕수수즙을 저장과 운송이 용이한 설탕이라는 결정체로 만드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인도 현지어로 설탕 결정체는 칸다(khanda)라고 불렸으며, 이 말이 candy의 어원이 되었다.

긴 항해의 필수 보급품으로 설탕과 버터를 적재한 인도 선원들은 다양한 무역로를 따라 교역을 하며 자신들이 접하는 사람들에게 설탕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포교와 순례 여행에 나선 불교 승려들은 설탕 정제법을 중국에 소개했다. 

굽타왕조가 붕괴되고 얼마간 북인도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다가 7세기 초 하르샤 바르다나 왕이 나타나 북인도를 다시 통일하고 지배하던 시기(606~647), 당나라로 파견된 인도의 외교 사절단이 당 태종(재위: 626~649)이 관심을 보이자 사탕수수 재배법을 가르친다. 그 결과 중국은 7세기에 처음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서기 647년 설탕 정제법을 익히기 위해 적어도 두 번의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이렇게 인도 무역상이나 외교사절단 덕분에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포함하는 남아시아에서 설탕이 음식과 후식의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전 세계의 정치가들과 실업가들은 설탕의 생산권 확보와 유통 문제를 놓고 온갖 지혜를 짜내느라 고심했다. 그 결과 브라질이나 카리브해의 섬 지역에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대농장, 즉 플랜테이션들이 만들어졌다.

설탕을 의미하는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의 한 지파인 타밀어 Sakkarai가 범어로 유입되어 śarkarā가 되고, 다시 페르시아어 shekar로 모습을 바꿨다가, 여기서 아랍을 만나며 아랍어sukkar로 현현(顯現)했다가, 마침내 영어 sugar로 최종 변신을 한다. 물론 말의 변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차용과 같은 말의 전이와 변전의 매개자는 사람이다. 사람의 이동이 없이 차용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차용의 과정에 깊숙이 개입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상인 집단이다. 고대로부터 상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서양의 바다와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교역로를 넘나들었다. 사막지대는 물론 험준한 산악도 불사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했고, 눈 덮인 히말라야, 힌두쿠시, 천산산맥을 넘었다. 아라비아해를 헤치고 인도양을 가르며 목숨을 걸고 돈벌이에 나섰다. 이런 상업활동이 문명의 교류, 문화의 전파를 가능하게 했다. 언어의 전파와 확산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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