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없고 선동만 있는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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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없고 선동만 있는 현수막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04.0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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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요즘은 전국 어디를 가나 봄꽃이 한창이다. 꽃이 일찍 핀 지역에서는 먼저 핀 꽃들이 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진달래가 지면 철쭉이 피듯이.

그런데 이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곳곳에 또 다른 울긋불긋한 것들이 나타나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적어도 내년까지 기다려야 다시 볼 수 있는 소중한 봄꽃들마저 마구 가려 버리고 있다. 그 울긋불긋한 것들의 정체는 바로 정치인들이 내건 현수막들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어느 정당 소속이건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정치적 구호들을 현수막에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고 있으니 이 금수강산이 과연 꽃 대궐인지 현수막 대궐인지 숫제 헷갈릴 정도다.

현수막이 이처럼 길거리에 지나치게 많이 내걸리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현수막에 쓰이는 문구들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그 현수막 문구들 대부분이 상대 정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정당이 정치적 현안들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현수막은 차라리 양반으로 보일 정도다.

이런 현수막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를 뒤덮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토론보다 선동으로 유권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현수막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들을 한가득 써 놓으면 자기 정당의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계산한 것일까.

이것이 정말로 선동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비방과 선동으로 가득 찬 현수막들은 결국 시민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버려, 시민들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하는 데 크든 작든 지장을 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람들이 선동과 비방에 더 잘 휩쓸리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민주 사회를 앞장서서 만들어 나가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뿌리를 갉아먹어 그 줄기마저 흔들리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정녕 현수막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 현수막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선동 구호보다 왜 특정한 현안을 특정한 방향으로 풀어 나가야 하는지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토론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았으면 한다. 굳이 길게 쓸 필요도 없다.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선동 구호 대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을 현수막에 정성들여 써 넣으면 된다.

흔히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려야 마땅한 것은 선거 이전에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토론과 소통이 아닐까 한다. 그 꽃이 있어야 민주주의라는 열매가 비로소 맺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방과 선동은 이 꽃을 시들게 하는 병충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많은 현수막들이 거리에 내걸릴지도 모른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 어떠한 현수막을 건다 할지라도 봄꽃을 함부로 가리지는 말기를,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 또한 가려 버리는 일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는 내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해야 할 일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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