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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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3.04.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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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통령이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 편협한 소견으로는 대통령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먼저 (‘걱정’의 주체를 특정하지 않았으므로, 추정한다면) 피해자들로부터 배상을 요구받는 가해자들, 즉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이 ‘나중의 구상권 행사’ 문제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도’ 책임을 부인하면서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걱정이 아니라 무시나 외면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설사 가해자들이 그 문제를 ‘걱정’한다고 하더라도, 가해자들 즉 일본 국민(일부)의 걱정에 대해 왜 한국 대통령이 미래를 약속하며 안심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의 정부라면, 식민지를 지배한 제국이자 군국주의 전범국의 정부와 기업들에 강제동원되어 고통을 겪은, 더하여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따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이중의 고통을 겪어온 자국민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게다가 피해자들의 ‘구상권 행사’는 사법부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삼권이 분립한 나라에서 대통령이 좌지우지할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국민 피해자들이 아니라, 책임을 부인하는 전범국의 가해자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가 없다.

대통령의 참모는 피해자들의 요구는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입장’이며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자국민 피해자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대신, 불법적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책임을 부인하고 강제동원의 피해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앞장서 받아들이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대통령은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해야 한다”면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호언했다. 대통령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을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부터 집어먹는 굴욕적인 자세’로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하는 것이 ‘일본을 당당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피해자의 피해를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한국의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입장’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는 한국 정부를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다른 참모는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인(이 경우에도 일부라고 해야 한다)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했다’고 자랑했는데,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걸림돌 제거로 ‘마음을 연 (일부) 일본인’이 시혜나 자비를 베풀어 ‘한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순진 무지하고 무모하게 기대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급기야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서 여-야 관계없이’ 나서는 일본 야당의 ‘얘기를 듣고, 반대만 하는 한국 야당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나는 ‘명예 살해’라는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는, 명예롭기는커녕 수치스러운 이름의 관습을 떠올렸다. 가족이나 부족 같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가부장의 부속물이나 소유물로 취급하는 가부장 권력 행사의 극단적 형태인 이 관습은 구성원이 겪은 피해조차 집단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뒤바꾸어 인식하고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귀속하고 살해한다. 

국가를 구성원들이 가부장의 판단과 결정에 일사분란하게 복종하는 집단으로 상정함으로써, 한국의 대통령은 국가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정책이라고 하기에는 돌발적이고 독단적일 뿐 아니라 내용이 너무 빈약한) ‘결단’에 반대하는 구성원들이 “작금의 엄중한 국제 정세”에 무지하고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으로 부끄러웠을 것이다. 국가 가부장으로서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도 무효화할 수 있고, 자국민 피해자들의 요구도 ‘걸림돌’이라고 판단하고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체와 객체를 뒤바꾸는 대통령의 순진 무지와 무모에 대한 의심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다른 자리도 아닌,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삼일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약육강식,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천명했다. 이 세계관은 피해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열등함’에 돌리며 제국주의 시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이다. 유럽 제국들에 정복당한 식민지들, 유럽인들에 노예사냥된 아프리카 원주민들, 유럽인들에 몰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세계사의 변화에 무지했다’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대통령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의 결단이 ‘한국 국민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세대에게 희망과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그 믿음을 나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자’만이 무모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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