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의 일본 작가, 조선의 고통과 한을 절절하게 형상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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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의 일본 작가, 조선의 고통과 한을 절절하게 형상화하다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3.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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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일본 작가들 눈에 비친 3·1 독립운동 | 세리카와 데쓰요 (옮김) 지음 | 지식산업사 | 476쪽
 

이 책은 3·1운동 전후 조선인의 삶을 그려낸 일본 작가들의 작품집으로,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세리카와 데쓰요 교수가 꼼꼼하고 사려 깊은 번역으로 관련 시와 소설 일체를 해방 전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100여 년 전 조선인들의 찌들린 삶 속에 피어난 사랑과 생명력의 노래를 담고 있는 이들 작품을 통해 3·1운동의 아픔과 좌절에도 이어지는 숨결과 대자연의 풍광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일본 작가들 눈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는 양가적이면서 모순적이기도 했다. 연날리기를 하는 설날의 풍경이나 북적이는 오일장의 정경은 정겹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한 가난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장마 후 떠내려가는 참외를 건져 먹으려다가 어린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거나, 만주의 좁쌀이나 피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한다(《간난이》). 피죽이라도 끓일 땔나무나 요기하러 드나들었던 마을 뒷산이 총독부림이 되어 버린 현실(《조선의 여인》)은, 제국주의가 표방한 근대 문명화가 얼마나 인간적인 삶과 괴리되어 있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내지화內地化’는 근대 소유관념의 도입만이 아니라 전통 풍속의 말살도 아울러 의미했다. 일본 헌병 중위가 조선의 궁중무희를 그린 작품의 제목을 강압적으로 바꾸라는 장면은(《이조잔영》) 전통의 압살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 작가들의 시선은 그들 개성만큼이나 다양하여 여러 주체들의 시각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불령선인》의 경우 주인공 에사쿠의 심리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고, 고바야시 마사루는 《조선ㆍ메이지 52년》에서 재조在朝 일본인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적인 인식을 보여 주는 한편, 오무라大村는 ‘소외된 식민자’라는 제3의 인물 유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일본이 들어와 조선 시골 읍이 달라졌다는 기시모토의 말은 미개한 조선의 ‘문명화’라는 식민지배 논리의 전파자인 도한渡韓 일본인(《근대 일본문단과 식민지 조선》) 의식, 또는 식민지정책을 합리화해 온 식민주의자(《식민지 조선의 풍경》)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그런가 하면 프롤레타리아 시인인 모리야마 게이는 노동자인 이진유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불》). 여러 빛깔의 시점 속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조선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 자신을 대변하는 일본인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불령선인》의 에사쿠, 《간난이》의 류지, 《이조잔영》의 노구치가 그러하며, 〈수양버들처럼 흔들린 손〉에서 단발머리의 작중 화자가 곧 작가 자신이다. 다만 스미 게이코는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없으면서도, 어린 소녀 영희의 눈으로 남아선호, 영호남 지역갈등 등 조선 사람들의 속내와 풍속을 들여다보듯 묘사하고 있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조선의 여인》). 젊은 시절부터 한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해 온 세리카와 교수는 10편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칠맛 나는 우리말로 생생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

조선인의 시점이든, 일본인의 관점이든 맨몸으로 맞선 3·1운동의 참상은 말 그대로 ‘비극’ 그 자체였다. 희열 할머니는 장날에 만세 행렬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해 죽음을 맞이했고, 순사의 아들과 친하게 지낸 간난이는 만세를 부른 뒤 눈 내리는 밤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낙과 소녀의 죽음은 3·1운동의 좌절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 준다(〈작품해설〉).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은 교회와 마을 전체를 불지른 제암리 사건은 무력을 앞세운 문명의 실체가 야만과 독수毒手로 드러났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제암리 사건 속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저자는 그 사건을 능가하는 대참극인 샛노루바위교회 방화사건의 역사 발굴을 촉구한다(《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 그의 양심과 노력으로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검열을 무릅쓰고 조선의 아픔을 그린 일본 작가들의 이야기가 뒤늦게 오늘 우리들에게 오롯이 전해질 수 있었다. 다시 3월을 맞아 그날 만세의 외침과 그 기억, “영혼의 행진”이 아지랑이 속 싹눈처럼 피어오르며, 붉은 함박꽃 가득한 조선의 서정적인 풍경 속 정감情感과 처절한 몸부림이 책을 덮어도 아른거린다. 고통받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포옹은 정치·경제적 입장 차이로 멀어져만 가는 한일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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