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믿는다는 어려운 일 - 『휴먼카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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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는다는 어려운 일 - 『휴먼카인드』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3.03.2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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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그렇다, 나도 언젠가부터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고 생각해온 것 같다. 자기만 알고 자기 것만 챙기는 존재라고, 교육과 규율을 통해 그나마 인격을 갖출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평소에는 그럭저럭 예의를 차리고 살지만 아마 사흘만 굶으면 눈에 뵈는 게 없을 거라고, 어떤 짓이든 해서 내 입에 넣을 걸 차지할 거라고도 상상했다.  

『휴먼카인드』는 여기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책이다. 인간의 선함을 믿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파헤친다. 일단 매일 접하는 뉴스가 문제다. 평온함은 뉴스가 안 되는 법이니 뉴스는 잔혹함, 비열함, 부도덕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뉴스가 재현해 주는 세상은 그래서 온통 어두운 빛이다. 다음으로는 심리학 실험과 분석 결과들이 도마에 오른다. 여러 자료를 통해 익히 들어온 교도소 실험이나 전기충격 실험이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되었고 각본을 거부한 참가자들은 결과에서 배제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이들 실험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뉴스와 심리학 실험 분석의 이면에는 권력자와 행정당국이 있다. 인간이 선하고 알아서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 자신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탓에 어떻게든 인간의 악함을 주장하고 싶은, 그리하여 악함을 드러내는 사건과 이론을 널리 퍼뜨리고 주입하는 원동력이다.

평소의 생각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경험을 했지만 『휴먼카인드』의 과감한 도전은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나도 너도 기본이 선하고 기꺼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세상살이는 훨씬 더 즐거워지지 않겠는가.

순진한 착각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저자 브레흐만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이 본래 악하고 한심한 존재라 주장하는 사람은 통찰력을 인정받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세상 경험 없는 철부지 취급을 받기 일쑤니까. 

그래도 나는 이 책에 설득 당했다. 아마 다음의 두 얘기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다. “우리 내면에는 두 마리 늑대가 늘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분노와 탐욕, 질투, 교만에 찬 악이고 다른 한 마리는 겸손, 정직, 사랑이 넘치는 선이다.” 손자가 어느 쪽 늑대가 이기냐고 물었더니 노인이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지.”

교도관과 죄수들이 어울려 햄버거를 굽는 노르웨이의 바스퇴위 교도소장 톰 에버하르트가 말했다.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대하면 그들은 쓰레기가 될 것이다. 인간처럼 대하면 그들은 인간처럼 행동할 것이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건 나와 우리,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이 악하다고 본다면 세상은 기껏해야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십중팔구 더 나빠질 테니까. 그래서 골목에서,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마주치는 모두가 선한 의지로 살아가고 있음을 나도 믿어보려 한다. 

아, 행인이 차에 깔리는 사고가 나자 주변 시민 십여 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함께 차를 들어 올렸고 2분 만에 무사히 구조했다고 한다. 바로 어제, 서울의 한 골목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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