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과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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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과 논증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03.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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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소설 줄거리를 불러주면 받아쓰는 강의를 들은 시절이 있었다. 소설을 읽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이 소설을 읽어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 교수의 강의 밑천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따위 것이 강의인가? 이렇게 나무라기 어렵다. 소설 줄거리를 적어놓고 논문이라고 하는 것들은 지금도 흔히 있어 피장파장이다.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니 유익한 논문이라고 한다. 유익하기는 해도 논문은 아니다.

논문은 이미 알려진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글이 아니다. 그런 글은 설명문이다. 논문은 설명문과 다른 논증문으로 이루어진다. 논증문과 설명문은 아주 다르다. 논증문은 다루는 대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를 독자로 하고, 아직 모르고 있던 사실이나 그 원리를 밝혀낸다. 논증의 타당성이 논문의 생명이다.

수학 논문이 논문의 특성을 가장 잘 말해준다. 이해하고 논평할 능력을 가진 독자가 극소수인 것을, 심한 경우에는 아직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논문을 쓴다. 논증의 타당성이나 발견의 의의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타당성을 다수결로 판정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다수결의 횡포를 제어하는 최후의 보루가 수학 논문이다.

문학 논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작품에 관해 논문을 쓰는 것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새로 밝혔기 때문이다. 새로 밝힌 사실은 숨은 원리인 것이 예사이다. 숨어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연구를 한 학자도 모르고 있던 원리를 새로 발견했으므로 논문을 쓴다. 논문은 얻은 결과가 타당한가 하는 토론을 요청하는 글이다. 

사실에 관한 설명은 맞거나 틀렸다. 사실과 같으면 맞고, 어긋나면 틀렸다. 원리를 발견한 논증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모르고 있던 원리가 새로운 논증 덕분에 처음 드러났으므로, 원리와 논증의 합치 여부가 결코 자명할 수 없고 심각한 논란거리다. 발견한 원리를 바로 시비할 수는 없고 논증 방법에 대한 논란을 먼저 해야 한다.  

사실 설명에는 질문이 따르고, 논문 발표는 토론으로 이어진다. 질문은 모르는 사람이 하고, 토론은 가장 잘 알아야 피차 도움이 되게 제대로 한다. 토론에서 논문의 잘못을 지적하면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토론이 다른 연구로 이어져 대안을 낳고, 이것이 다시 토론의 대상이 되어 학문이 연쇄적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운동 경기와 같다. 경기를 하는 현장에 들어와 토론을 하고 새로운 연구의 당사자가 되지 않고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오직 선수의 학문만 있고, 구경꾼의 학문은 없다. 선수는 관중을 상대로 하지 않고, 다른 선수와 경기를 한다. 관중을 상대로 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해설자는 선수가 아니다. 해설은 경기가 아니다. 

운동 경기에서는 이처럼 명백한 구분이 학문에서는 흔들려, 선수가 관중을 경기 상대자로 삼기도 하고, 해설이 경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선수가 경기를 하다가 말고 관중석으로 와서 자기 자랑을 잔뜩 하고 박수를 쳐달라고 하는 이상한 짓거리도 볼 수 있다. 경기와는 무관하게 일반 독자를 상대로, 상대방 선수를 깎아내리고 자기를 높이는 해설을 하는 추태도 보인다. 가장 총명하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활동 영역인 학문에 갖가지 저질의 반칙이 난무한다.

외국문학 연구 논문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써서 한국에서 발표하면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고 장외에서 서성거릴 수 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설명하면서 연구를 한다고 속일 수 있다. 외국문학 소개나 설명이 필요하고 평가해야 하지만, 논문이 아닌 개설서를 써서 할 일이다. 

저서는 다 개설서인 것은 아니다. 논문을 길고 자세하게 쓴 연구서가 최고의 논문이다. 논문뿐만 아니라 연구서도 경기가 이루어지는 언어로 써서 경기 상대방 선수와 토론을 할 수 있게 내놓아야 한다. 대단한 업적의 가치가 경기에 참가하지 못해 무시되면 원통하다. 관중의 찬사를 득점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연구서가 아닌 개설서는 이와 다르다. 경기 종목이 아니고, 상대방 선수가 아닌 한국의 관중에게 필요하므로, 한국어로 써서 한국에서 출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잘 정리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한국어로 옮길 수 없는 것은 미련을 가지지 말고 버려야 한다. 시 작품을 해설할 때 이런 아픔이 가장 크다.

이런 원칙이 한국학 연구에도 그대로 타당한다. 어떤 외국인이라도 한국학 연구 논문은 한국어로 써서 한국에서 발표해야, 장외에 머물지 않고 경기장에 들어와 경기를 한다. 관중의 위치에서 벗어나,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주역이 된다. 자국의 독자를 위해서는, 논문이 아닌 개설서를 써야 한다. 그 요령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한국학을 비교연구를 통해 확대하고 발전시킨 논저는 한국어로 쓰고 말 수 없다. 두 나라 비교이면 두 말로, 세 나라 비교이면 세 말로 쓰는 것이 이상적인 방안이다. 장점을 각기 지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을 다국적 공동연구로 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

동아시아 비교이면 한문을 되살려 쓰는 것이 좋다. 이것은 가능하고, 내가 시험한 적이 있다. 한ㆍ중ㆍ일 학자가 모여 동아시아 전통문화에 관한 학술회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거론하는 자료 원문이 거의 다 한문이어서 손상을 줄이고, 논증을 타당하게 할 수 있었다.  

영어창조물은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은 논저를 영어로 쓰면 연구해낸 결과가 뒤틀린다. 널리 알리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면, 간략한 해설을 영어로 할 수 있다. 해설은 논문이 아니고 대용품이다. 실물이 아니고 사진이다. 실상과 바로 만나지 못하면 대용품이나 사진이 필요하다.  

나는 내 연구에 관한 해설문을 많이 써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고, 해설서 두 권에 수록했다. 해설을 읽고 분발해 원본에 들어와 토론을 할 자격을 갖추라고 독려한다. 한국학의 공용 학문어인 한국학을 힘써 익히라고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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