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극단적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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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극단적인 선택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3.03.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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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 김영명 교수의 〈생활에세이〉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많이 늙은 나!)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떤 소련 출신 사나이가 나와서 미국의 언론 통제나 소련의 언론 통제가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저런 미친놈이 있나 하면서 소련 측의 억지로만 여겼다. 그의 논리인즉 소련에서는 당이 언론을 통제하지만 미국에서는 자본이 언론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통제는 통제지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과장이었을망정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자본주의 겸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자본과 사회적 분위기이다. 자본이 언론 자유를 침해한다는 사실은 너무 많이 알려져서 새롭지도 않거니와, 내가 요즘 불편을 느끼는 것은 대중의 자기 검열을 통한 언론 통제이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피씨. 난 이게 개인용 컴퓨터인줄 알았지.)이 기승을 부려 뭔 말을 못하게 한다. 차별과 혐오의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도 지나치면 곤란하다. 뻑 하면 여혐이요 소수자(소수인 아니고?) 혐오요 하면서 말을 못하게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키가 작다고 말하는 것도 겁이 난다. “남자보다 키 큰 여자도 얼마든지 있다고요! 이건 여혐이라고요!” 

그런데 실상 혐오라고 표현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혐오라기보다는 비하에 가깝다. “흑인들은 머리가 나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비하이지 혐오는 아니다. 이런 비하를 공개석상에서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가 비난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혐오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혐오할 것은 혐오해야 한다. 난 김정은 세습체제를 혐오하고 지리산 밀렵을 혐오한다. 그리고 혐오에 대한 과도한 혐오를 혐오한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목표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 일상생활의 표현을 제약하는, 올바름과는 별로 상관없는 현상으로까지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토박이말을 강제로 버려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곰배팔이, 앉은뱅이, 구두닦기, 때밀이 등등. 좀 천해 보이는 건 사실이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이 우리 것을 천시해 온 증거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고매한 한자말도 이젠 못 쓰는 것들이 많다. 자살도 못 쓰고 유튜브에서는 마약이란 말도 못 쓴다. 

언론 기사에서 누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길래 나는 어느 시원찮은 국회의원이 사퇴하는 선택인가 했더니 그게 자살이란 거였다. 이젠 ‘죽었다’라는 말도 못 쓸 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에서는 병신이란 말도 못쓴다. 좀 나빠 보이는 말은 아예 차단을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누가 무슨 권리로 정하는 것일까? 병신과 머저리라는 소설을 쓴 이청준은 망했다. 

나는 위에서 의도적으로 ‘미친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친 인간이고 맘에 안 드는 인간이면 미친놈이 맞다. 이걸 ‘정신 장애를 가진 분’이라고 쓸까? 그럼 다시 써 보자. “저런 정신 장애를 가진 분이 계실까 하면서” 운운. 참 맛과 뜻이 딱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잘 살게 되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사람이 점점 더 유약해지는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섭씨 30도만 넘어도 폭염이라고 난리 치고 영하 10도만 되어도 다 얼어서 (죽지 않고) 돌아가실 것만 같고. 30년 전에는 미세먼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는데, 우린 그런 단어도 모르고 살았었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없었던 미세먼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지. 인간의 면역력은 날로 떨어져서 한 50년이 지나면 우리 모두가 방호복을 입거나 멸균실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언어 표현에 대한 면역력도 마찬가지이다. 자살이란 단어를 못 견뎌 하고, 못 생긴 것을 못 생겼다고 말 못하고, 죽었다고 하면 천하고 생을 마감했다 하면 고상하고, 당선자는 당선된 놈이니까 당선인이라 해야 하고...그럼 시청하는 나 시청자는 시청하는 놈인가? 신문 기자는 쓰는 놈이고? 정치적 올바름의 득세와 언어 면역력의 저하는 우리의 언어생활을 어렵고 맛없게 만든다. 비속어도 필요하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겠지. 깡패의 대사를 쓰면서 "선생님 제 손에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싫으시면 칼(삐--하면서 묵음 처리)로 극단적 선택을 하시든가요." 이렇게 써야 하겠습니까? 

나는 시류와는 다른 이런 글을 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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