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시간에 스피닝을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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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간에 스피닝을 하겠다고?
  • 김정배 원광대학교 교양교육원
  • 승인 2023.03.2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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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닝 활동

인문예술 스피닝 수업을 개설하다

5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수업 도중 학생 하나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내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가 싶더니, 강의실 맨 뒤쪽에 가 섭니다. 그 자리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합니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며 수업을 끝까지 듣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그 이유에 관해 묻자, 밀려오는 졸음을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그랬다고 합니다. 잠을 쫓아가며 끝까지 수업에 집중하려는 학생의 대답이 가상했지만, 한편으로 수업에 학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지 못한 교수자로서의 자책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그날부터 대학이라는 학문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수업 방식과 교수학습법에 대한 모험심과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중 휘트니스 센터에서 각종 동영상 강의를 보며 운동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득 ‘러닝머신을 쓰거나 스피닝 자전거를 타면서 혹은 스텝퍼를 즐기면서 교양수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다음날 저는 곧장 제가 근무하는 대학의 교양 교과목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구상하고 있는 인문예술 스피닝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거칠게나마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강의실에 실내용 자전거를 무작정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행정 절차가 필요하고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날부터 저는 전공 수업은 어렵겠지만, 교양수업에서의 만큼은 학생과 교수자가 함께 스피닝 자전거를 타면서 수업 진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수시로 설득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5년여라는 긴 침묵의 시간을 지나, 2023년 1학기에 드디어 인문예술 스피닝 전용 강의실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강의실에는 스피닝 자전거 30대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부터 본 교과목의 학생들과 저는 대한민국 최초로 스피닝 자전거를 타며 교양수업을 진행하는 사람들로 기록됩니다. 


수업 방식의 ‘판’을 바꾸다

매주 수업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어김없이 ‘인문예술 스피닝’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옵니다. 수업 시작 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스피닝 자전거에 오릅니다. 대표 학생의 북소리 장단에 맞춰 가볍게 스피닝을 시작합니다. 이후 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수업이 진행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준비한 서툰 피아노 소리와 기타 연주에 맞춰 스피닝을 하기도 하고, 사전 약속을 통해 준비한 짧은 영화나 유튜브 강연을 시청하면서 페달을 밟기도 합니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30분 정도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교수자인 제가 인문예술 강연을 시작합니다. 저 또한 스피닝을 하면서요.

이번 주 수업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죄수들의 보행」(1890)을 보여줍니다. 「죄수들의 보행」은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지요. 스피닝 자전거를 타며 고흐의 「죄수들의 보행」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금의 상황과 비슷한 어떤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보행하고 있는 모습이 대한민국의 대학 사회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말 그대로 ‘파놉티콘’(panopticon)의 세계이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러닝머신과 같은 운동기계는 사실 그 옛날 ‘트레드밀’(treadmill)이라고 불리는 죄수들의 형벌기구였음을 설명합니다. 1800년대 영국의 죄수들을 처벌하기 위해 고안된 고문 기구 말입니다. 그러나 1952년 고문 기구였던 트레드밀은 워싱턴 대학의 로버트 브루스 박사와 웨인 퀸튼 박사에 의해 심장과 폐 질환을 진단하기 위한 의료용 기기로 탈바꿈합니다. 

대화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세상의 ‘판’을 바꾸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습니다. 러닝머신이라고 불렸던 트레드밀이라는 고문 기구가 의료기기로 탈바꿈한 것도 누군가가 ‘판’을 바꿨기에 가능한 사건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를 역행자(逆行者)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쉽게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변증을 거듭하는 사람 말이지요. 다시 빈 센트 반 고흐의 그림 「죄수들의 보행」을 떠올려 봅니다. 죄수들의 보행 속에는 파놉티콘의 세계가 물밑에 도사립니다. 말 그대로 감시받는 현재 우리 인간의 자화상이 그대로 은유화됩니다. 배울 수 있는 것만 학습하고, 학습된 것만 믿고 의지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 말이지요.

저는 그 파놉티콘의 세상 곁에 슬쩍 판테온의 세상을 끌어들입니다. 주지하다시피 판테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한 말이지요. 판(Pan)은 ‘모두’라는 뜻이며, 테온(Theon)은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말하자면 파놉티콘의 세상(모두가 감시받는)과 판테온의 세상(모두가 신이 되는)은 정반대에 위치합니다. 대학 수업에 스피닝 자전거를 도입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입니다. 교수자가 이끄는 대로 배움을 학습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몸과 마음을 이끌 줄 아는 수행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무면허 자전거 학습자들이 꿈꾸는 어떤 세상

벌써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한창입니다. 대학 교정에서는 꽃그늘을 따라 학생들의 마음이 붕 떠다닙니다. 이때쯤이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춘곤증까지 밀려옵니다. 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교수자들 또한 몸과 마음이 나른하기 십상입니다. 강의실 책상에 습관처럼 앉은 학생들 또한 보이지 않는 무기력과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교수자들의 노력 또한 수포가 되기 일쑤입니다. MZ 세대에는 무슨 수를 써도 안 통한다는 볼멘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결국, 교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학 교육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봄날 찾아드는 졸음 앞에 장사는 없으니까요. 

이번 학기만큼은 전에 없던 희망을 품어봅니다. 우선, 스피닝 자전거를 타면서 꾸벅꾸벅 조는 학생은 없으니까요. 아직은 스피닝을 도입한 수업 방식이 무면허 자전거 운전자들처럼 갈팡질팡하지만 매 순간 자신감 있게 자기만의 스피닝 페달을 밟고 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만 합니다. 이 수업에서 사용되는 스피닝 자전거가 고문 기구가 될지 아니면 유용한 학습 도구가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속에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김훈, 『자전거 여행』)라는 사실을 믿고 나갈 뿐입니다. 비록 지금의 순간들이 땅 위의 일엽편주처럼 외롭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새로움이 오늘도 학생과 저를 대학 강의실로 신나게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김정배 원광대학교 교양교육원

원광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글마음조각가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다원 예술가. 2019년 제18회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제1회 백인청춘예술대상, 제11회 천인갈채상 수상. 시평집 『나는 시를 모른다』, 비평집 『라그랑주 포인트에서의 시 읽기』, 포토 포엠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하루』, 『사진이라는 문장』, 왼손 그림 시화집 『이별 뒤의 외출』과 그림책 『사과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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