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현대사회의 언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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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현대사회의 언어가 되다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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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소비 수업: 우리는 왜 소비하고, 어떻게 소비하며, 무엇을 소비하는가? | 윤태영 지음 | 문예출판사 | 336쪽
 

바야흐로 소비가 모든 것이 된 시대다. 지성과 욕망, 스포츠와 예능, 진보와 보수, 공간과 취향까지도 소비되는 시대, 소비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열한 가지 풍광을 살펴보는 책이다. 유행, 공간, 장소, 문화, 광고, 육체, 사치, 젠더, 패션, 취향 등 저자가 선별한 열한 가지 키워드는 현대인의 일상은 물론, 가장 은밀한 곳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소비의 의미를 찾는데 중요한 길잡이로서 작용한다.

유행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현대인은 새롭게 등장하는 핫 플레이스에 열광하며 공간소비에 몰입하는지? 현대사회에서 교양과 매너는 어떻게 구별짓기를 위한 기제가 됐는지? 그리고 현대인들이 몸 가꾸기의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 소비를 통해 저자는 현대인의 욕망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한다.

저자에 의하면 지금까지 소비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초기 자본주의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정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았다. 금욕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소비’는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소비를 천박한 물질주의나 무분별한 쾌락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소비의 중요성은 점차 커진다.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19세기 일반 대중이 노동자가 됨으로써 근대인이 됐듯, 20세기 이후 대중은 소비자가 됨으로써 현대인이 되었다.

이 책은 소비가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봉 마르셰 백화점 성공 과정 등 역사적인 측면도 살펴보고, 점차 커지는 소비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좀바르트, 짐멜, 벤야민, 보드리야르와 부르디외 등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독자들이 소비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체제의 운영 메커니즘을 엿볼 수 있게 도움을 준다.

현대인은 매일 무언가를 소비한다.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식사하고,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를 가는 모든 행위는 소비로 시작해 소비로 귀결된다. 현대인에게 소비는 단순히 ‘재화’를 소비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BTS의 음악이나 클래식과 같은 문화를 소비하거나, 다양한 종류의 와인이나 커피를 감별할 수 있는 취향을 소비하거나, 홍대나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공간을 소비하기도 한다. 한때 ‘절약’이 미덕이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플렉스 소비’처럼 고가의 상품에 돈을 쓰면서 자랑하는 소비 방식도 생겼다. 현대인은 어떤 물건, 어떤 공간, 어떤 문화를 소비하느냐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유행과 소비다. 소비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유행에 민감하다. ‘힙’한 것을 쫓아 연남동으로, 망리단길로 몰려가거나, 새로운 브랜드가 등장하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소비하고 경험담을 경쟁하듯 SNS에 올린다. 현대인에게 유행에 뒤처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유행에 뒤처진다는 것은 삶의 양식과 존재 방식이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에 머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유행을 다루며,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의 역할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말한다. 유행은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유지함은 물론 소비를 습관화한다. 그리고 이미 포화 상태에 도달한 소비시장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낸다. 유행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듭하며 현대인으로 하여금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만든다. 저자는 유행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수많은 원동력 중 하나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현대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소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단순히 사물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기호를 소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형식적으로 계급이 없어진 현대사회에서 소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계급적 차이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분석을 끌어온다. 부르디외는 특별한 취향과 소비에 대한 선호, 더 나아가 삶의 방식을 계급의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했다. 부르디외는 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특정의 생활양식을 채택하고 이를 통해 다른 계급과의 구별짓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고 강조했다.

취향, 특히 문화 취향의 차이는 주로 개인의 타고난 본성으로 설명되면서, 취향의 차이가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연구 결과가 나오자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취향에도 계급적·문화적 차이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구별짓기’는 현대사회의 소비 형태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소비를 구별짓기를 위한 현대인의 욕망이 분출되는 통로로 바라본다. 자기 과시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는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역시, 소비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기 위한 욕망의 표현이다. “현대인들은 과시적으로 드러냄을 통해서 때론 보다 은밀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그들의 구별짓기 욕망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 구별짓기를 위한 소비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중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소비 대상의 변화와 소유하지 않는 소비다. 물질적 소유보다는 공유와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 핫 플레이스가 아닌 특색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공간소비, 재미와 의미를 공유하는 경험소비, 과시보다는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문화소비 등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이처럼 공유와 경험이 소비의 최대 화두로 자리를 잡은 지금, 저자는 과시적이고 중독적인 소비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하고 깨어 있는 소비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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