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과 ‘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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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과 ‘빌둥’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03.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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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2023년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심각한 것은 다름아닌 부동산 문제일 것이다. 필자 역시 한 가정의 세대주로서 이 문제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주택이나 토지를 소유한 사람도,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는 땅에 세들어 사는 사람도 부동산 문제,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집값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집값이 문제인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바로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값이 떨어진다 해도 집이 없는 사람에 비해 집을 가진 사람이 더 부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구세주 위에 건물주’라는 유행어가 생겨난 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목록에서도 ‘건물주’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이 이렇게 너도나도 빌딩(building), 즉 건물을 짓거나 소유해서 돈을 버는 데 관심을 가지는 사이 사람에게 필요한 교양에는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 돌이켜 보면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한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소문에 따르면 외국 사람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어야 중산층이라고 하는 반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오직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고 한다. 이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경제는 성장했어도 교양 수준은 안타깝게도 그에 발맞추어 성장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적어도 대한민국의 사정에 한해서만큼은 진실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가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 불편한 진실을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앞장서서 고발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해야 할 대학이 오히려 학교 바깥의 사회보다도 더 물질적인 가치에 매몰돼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대학의 민낯이다. 작년(2022년)에 필자가 이 칼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참조: 2022년 7월 4일 자 조원형 칼럼 “학생은 고객이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고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그 가장 큰 증거다.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대학 서열화 또한 학생이 고객이 되어 버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학교도, 학생도 어느 대학은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 학교라고 여기면서 마치 여러 물건들의 값을 견주듯 학교들의 값어치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 값어치를 따지는 기준은 세속적이기 그지없어서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기조차 망설여질 정도다.

게다가 오늘날 대학에서 ‘교양’이라는 말은 전공 수업 이외의 수업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리고 그 교양 수업들은 대부분 특정 분야 전공 지식을 비전공자들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교양’이라는 말의 의미를 고민하면서 교양 과목을 강의하는 교수들도 곳곳에 있겠지만 아직은 다수라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양 수업을 담당하는 교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인 강사와 비전임 교수들이라는 것 또한 ‘교양적이지 않은’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한다는 나라에서 ‘교양’을 이런 뜻으로만, 이런 모습으로만 받아들이면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과연 사회에 나와서 교양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렇게 교양이 부족한 사회가 되다 보니 국익을 위해 일한다고 자처하는 정치인들에게서 교양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외교 무대에서 실언을 일삼아 온 정치인이 자신의 말을 반성하기는커녕 학창시절에 국어 과목이 재미없었다면서 “우리말을 뭣하러 또 배우나”라는 망언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외교 참사들 역시 이렇게 교양을 제대로 쌓지 못한 정치인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교양을 갖춘 정치인이라면 과연 한일 정상 외교 무대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감 없이 감히 ‘미래’니 ‘미래 지향적’이니 하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미래가 과연 제대로 된 미래라 할 수 있겠는가.

‘교양’을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는 ‘빌둥(Bildung)’이다. 이는 ‘형성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빌덴(bilden)’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교양이라는 뜻이다. 한눈에 보더라도 독일어와 친근관계가 있는 영어의 ‘빌드(build)’, ‘빌딩(building)’과 뿌리가 같은 단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 오늘날 한국 사회는 ‘빌딩’만 있을 뿐 ‘빌둥’은 없는 사회로 보인다. 건물을 만들든(building) 사람을 만들든(Bildung)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제는 ‘빌딩’을 세우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사람을 세우는 ‘빌둥’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건물은 잘못 만들면 허물고 세울 수 있지만 사람은 잘못 만들면 돌이킬 수가 없다. 알고 보면 빌딩보다 빌둥이 훨씬 더 중요한 이유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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