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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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3.20 0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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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조너선 갓셜 지음 |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356쪽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는 우리 사회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이 책에서 저자 조너선 갓셜은 이야기는 부작용이 있는 ‘필수적 독’이며 이를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문명을 건설한 바로 그 전통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오늘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학, 사회학, 철학, 진화심리학, 신경생물학에서 가져온 연구 결과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엮어 넣어 독자를 설득한다. 원시시대 동굴 들소의 출현에서 고대 아테네의 황금시대와 트로이목마까지, 도시괴담과 음모론에서 넷플릭스와 《해리포터》 까지 이야기를 종횡무진하며 스토리텔링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하는 문제와 해결책은 사실 동일하다.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동물’ 호모 픽투스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코로나19의 대유행, 계속되는 전쟁, 포퓰리즘 선동가의 부상,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한 계급적 긴장, 그리고 각종 궤변 때문에 동일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탈진실 세계의 도래를 보며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생존과 진화를 보장한 연장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오늘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실은 ‘이야기’가 세상에 수많은 혼돈, 폭력, 오해를 일으키는 주범인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본성 깊숙이 새겨진 ‘이야기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강력해서 인류의 진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인류는 이야기를 통해 지식을 전수하고, 서로를 설득해 이해를 증진했으며, 공감을 강화하여 집단을 결속했다. 그렇게 문명을 건설했다.

인류의 이야기 사랑은 수만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기술 발달 이전에는 춤, 노래, 미술, 대화 정도가 이야기의 전부였지만, 오늘날 인간은 비대면으로도 24시간 내내 계속되는 ‘이야기 과잉 시대’에 산다. 물론 이야기가 문명을 발전시킨 것처럼 좋은 쪽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어두운 측면으로도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 

대체 인간의 ‘뇌’와 ‘이야기’에 어떤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에 우리를 쥐락펴락하는가. ‘이야기 과학’의 핵심을 하나 꼽자면, ‘서사 이동(narrative transpor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이동이란 “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는 미묘한 감각”을 말한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때는 몇 가지 현상이 잇따른다. 첫째, 서사이동을 할 때 우리는 현실 세계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된다. 둘째,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잊는다. 셋째, 이를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에 ‘빠진다.’

이야기가 강력할수록 우리는 주인공에 깊이 이입해 허구에 대한 불신을 유예하고, 강렬한 감정을 활성화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한마디로 우리는 ‘설득’당한다. 그런데 서사이동에도 치명적인 양면성이 있다. 엄청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면, 인간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무력화’한 채, 정보와 믿음을 ‘주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야기에 빠진 뇌’에 대한 비밀을 푼 학자, 기업, 종교인, 정부기관들은 이미 디지털 데이터를 수집해 더 솔깃하고, 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맞춤형 서사를 우리에게 공급하고 있다. 물론 이 맞춤형 서사를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의 자물쇠를 열어 서사이동의 황홀경에 빠뜨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전제가 따른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성공하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요소’는 매우 단순하다. 그 비법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이야기는 말썽에 관한 내용일 것, 그리고 둘째, 이야기에 깊은 도덕적 층위가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살며, 다양한 정체성으로 갈가리 찢겨 있다. 한쪽에선 ‘말썽’과 ‘권선징악’이란 보편문법에 맞춰 자신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다른 쪽에선 그것을 이용해 타자에 대한 ‘적의’를 부추긴다. 테크의 발달로 우리는 편향된 ‘이야기우주’에 24시간 틀어박혀 살며, 자신이 솔깃한 이야기들을 주변인들에게 끝없이 공유한다. 이제 인류는 같은 현실에 살면서도 다른 것을 보는, 탈진실의 ‘인포칼립스(Infocalypse)’에 들어섰다.

오늘날 문명이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여러 학계에서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우리는 ‘이야기’라는 낱말이 주는 호감과 무해함 때문에 그것이 원인임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저자는 우리 자신이 슬기로운 동물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이야기에 중독된 동물 ‘호모 픽투스’임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사회에 작용하는 은밀한 방식을 똑똑히 알리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인문학과 과학에서 연구된 탄탄한 학문적 근거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엮어 넣어 이 책을 썼다. 

만약 저자의 이야기가 우리를 서사이동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도 그의 메시지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의분(義憤)를 일으킬 때, 그 이야기꾼이 과장, 위조, 비논리 같은 허튼소리를 끼워 넣은 건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현생인류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모험’의 길이다. 힘겨운 도정을 떠나는 호모 픽투스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가 제안하는 너그러운 경험칙을 남긴다.

"이야기를 증오하고 거부하라.
하지만 이야기꾼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평화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야기에 말 그대로 반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들을
경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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