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번역’된다…과학에 대한 인식론주의를 넘어라
상태바
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번역’된다…과학에 대한 인식론주의를 넘어라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3.20 0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  브뤼노 라투르 지음 | 이세진 옮김 | 김환석 감수 | 사월의책 | 264쪽

 

오늘날 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모순과 기이한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 지구의 위기를 주장하는 생태주의자와 과학기술의 해결능력을 믿으라는 과학자,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와 그 파멸성을 경고하는 운동가…. 우리는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러한 ‘논란 속의 과학’을 단순한 찬성이나 반대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 관계까지 포괄하는 인문학의 지평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스스로 자기 사상의 요체를 편지 형식으로 소개한 것으로,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자율적이라는 통념을 뒤엎고 근대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과학과 정치,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폭넓은 인문학적 시야와 도발적인 과학사 해석을 바탕으로 한 여섯 편의 편지는, 아르키메데스에서 영화 〈아바타〉에 이르는 생동감 넘치는 사례들을 통해 과학기술로 둘러싸인 현대 사회의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며, 철학과 자연과학이 그간 씨름해왔던 인간-자연-사회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아리아드네의 실을 제시한다.

첫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과학의 자율성이란 신화일 뿐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번역’의 방식으로 과학이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언제나 정치와 사회 등 여타 삶의 영역으로 ‘우회’하거나 그 영역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정치가 서로 무관한 두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얽혀서 작동하는 두 종류의 ‘행위’가 있을 뿐이며, 이 행위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결합-조립-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더 이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고 말한다. 라투르가 ‘과학인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더욱 밀착되고, 과학과 사회가 더욱 얽히고설키는 우리 시대에서는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정치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편지에서 라투르는, 과학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과학을 ‘인식의 문제’로 보는 데 있다고 한다. 과학적 진리를 누가 더 많이 발견하는지, 또는 그 인식이 인간에게 가능한지만을 물어온 것이 ‘과학혁명’ 및 기존의 과학이론가들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수많은 반박과 재반박, 무수한 우회와 번역 작용을 통해 실제로 인간과 자연의 실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실제적, 물질적 모습에 대해 둔감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과학혁명’이라는 허구적 관념에서 비롯되는 어떤 인식론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분석이다.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은 진리가 한편에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이 또 한편에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라투르는 이런 과학혁명 담론의 인식론적 기반은 근대 이분법적 사고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실체’와 ‘연장(延長)된 실체’, 곧 정신과 사물로 분리되는 이원론을 추구함으로써 과학을 물질이 일개 주체로서 개입한 결과물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으로 묶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 속에서는 동물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이 연장된 실체로 환원될 뿐, 자연이 인간의 인식 영역에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된다. 이런 이원론은 어떤 점에서 과학을 혁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러한 환원주의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행위자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학자 그룹, 인간 상호간, 나아가 인간과 물질 간의 갈등과 조정과 타협으로 진행되는 과학의 실제 모습은 완전히 망각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런 근대적 세계관의 폐해에 대해 ‘우리는 생각한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자연이나 타인을 대상화하는 시각을 넘어 각자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공통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각자’란 과학자, 정치가, 시민 등 인간 구성원에서 시작해 사물과 자연의 존재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만들어왔고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공통적인 삶은 이런 구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과학이 초월적으로 주어지거나 자연에서 그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세계의 구성원(인간, 비인간)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이해할 때, 지구 온난화 문제와 같은 공통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도 열릴 수 있다고 라투르는 말한다. 인간과 사물이 한자리에 모여 ‘인간들의 의회’(상원)와 ‘사물들의 의회’(하원)를 구성할 때, 더 좋은 공통세계를 향한 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