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 특수한 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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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 특수한 교과
  •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 승인 2023.03.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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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칼럼]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사과문에 달린 댓글이다. 이를 두고, 요즘 젊은 것들은 ‘심심한’의 의미도 모른다, 한자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즉물적인 반응이 나왔고, 늘 그렇듯이 애초에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잘 사용하지도 않은 말을 쓴 사람이 잘못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곧이어, 이는 낱말의 문제가 아니라 문해력의 문제다, 요즘 젊은이들은 문맥을 읽을 줄 모른다고 개탄하는 반응이 나왔다. 

어차피 우리는 모든 낱말을 알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특정한 어떤 낱말의 뜻을 모르더라도 앞뒤 맥락으로 그 뜻을 파악한다. ‘심심한 사과’에서 ‘심심한’의 뜻을 몰라도 그 맥락을 통해 심심해서 사과한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심심한’이란 낱말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문해력이라는 것이다.

이제 요즘 젊은 것들은 왜 문해력이 떨어지는가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온다. 글을 읽기보다 정답 찾기 교육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들로부터, 이것은 단순히 문해력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태도의 문제다, 상대의 말을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서 공격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교육의 실패이고, 우리 사회의 실패라는 심오한 원인 분석까지 나온다. 일찍이 데이빗슨이라는 철학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해야 하며, 이를 ‘자비원리’라고 불렀는데, 그러니 저 댓글들은 상대의 말에 자비를 베풀지 않고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된다.

그런데 자비원리는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를 해석할 때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제 저 댓글들을 자비원리에 따라 해석해 보자면, “심심한 사과? 웃기고 있네!”로 반응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즉, 요즘 젊은 것들이 볼 때 ‘심심한 사과’는 그냥 상투적으로 사과할 때 하는 말이고, 따라서 진심이 담긴 사과가 아니다. 그래서 동음이의어를 이용해서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라고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대방을 선의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정작 부족한 사람은 누구일까? 

고등교육법 시행령에 의하면 초빙교원은 “조교수 이상의 자격기준을 갖춘 사람 또는 이에 준하는 해당 분야 경력을 보유한 사람으로서 특수한 교과를 교수하게 하기 위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으로서’의 앞부분은 초빙교원의 자격 기준을 나타내고, 뒷부분은 사용 사유를 말한다는 것쯤은 한국어 문장을 좀 아는 사람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으로서’가 아니라 ‘또는’에서 잘라 “조교수 이상의 자격기준을 갖춘 사람” 또는 “이에 준하는 해당 분야 경력을 보유한 사람으로서 특수한 교과를 교수하게 하기 위한 사람”으로 읽고는, ‘특수한 교과’는 ‘이에 준하는 해당 분야 경력을 보유한 사람’이 교수하는 교과이고, ‘조교수 이상의 자격기준을 갖춘 사람’은 특수한 교과뿐 아니라 일반 교과도 교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학이 있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교원의 임무는 ‘교육·지도 및 연구’다. 그런데 대학에는 그러한 임무를 갖지 않은 교원들이 또 있는데, 겸임교원은 “순수 학술 이론 과목이 아닌 실무·실험·실기 등 산업체 등의 현장실무 경험을 필요로 하는 교과를 교수하게 하기 위한 사람”이니, 통상 겸임교원과 함께 한 묶음으로 겸·초빙교원으로 불리는 초빙교원이 교수하게 될 ‘특수한 교과’는 교원이 교수하는 교과도 아닐 것이고, 겸임교원이 교수하는 교과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자격 기준으로 ‘조교수 이상 또는 이에 준하는 해당 분야 경력을 보유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록 조교수 이상의 자격 기준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 경력을 보유한 어떤 사람, 가령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예술가나 장인, 인간문화재 등을 특별히 초빙하기 위한 교원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실로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은 대학이 있으니, 그 대학은 그동안 교양필수로 운영하던 글쓰기 강좌를 교수하기 위해 초빙교원을 임용하기로 하면서 글쓰기 교과를 ‘특수한 교과’로 해석하였다. 글쓰기는 대학 교육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글쓰기 수업이 ‘특수한 교과’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대학은 ‘필수 교과’, ‘일반 교양’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겸임교원은 학술 이론 과목이 아니라 산업체 등의 현장실무 경험을 필요로 하는 교과를 교수하기 위한 사람인데, 이들은 대학이 아니라 자신의 원소속기관에서 3년 이상 상시적으로 근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강사로 임용해야 할 사람을 굳이 겸임교원으로 전환하라고 하면서 무슨 무슨 협회건 학원이건 어디서건 자격증을 발급받아서 오라고 하는 대학이 있다고 한다.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할 교육부에서는 이를 조사하지도 않고, 설령 적발되더라도 그 책임은 그런 자격증을 발급받은 강사가 지는 것이지 그렇게 하라고 한 대학이 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들이 이토록 무리해서 겸임교원과 초빙교원을 채용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정 수의 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등교육법에는 누가 교원인가를 규정하고 있는데, “총장이나 학장 외에 교수·부교수·조교수 및 강사”가 그들이다. 이들을 통상 ‘법정 교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비법정 교원들도 있기 때문이고, 그들이 바로 겸·초빙교원 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비법정교원도 교원확보율에 들어간다. 대학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인문계열의 경우 학생 25명당, 의학 계열의 경우 8명당, 그 외 나머지 계열의 경우 20명당 1명의 교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일반대의 경우 25%까지 겸·초빙 교원을 임용하여도 교원확보율을 충족한 것으로 간주해 준다. 교원이 아닌 사람들이 교원확보율에 포함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목하 벌어지고 있다.
   
교원확보율은 대학 운영의 기본이고 필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확보해야 할 교원이 많지도 않다. OECD 평균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15명이고, 현재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는 13.7명이고, 중학교는 11.7명, 고등학교는 9.6명이다. 사실 대학설립·운영규정은 1996년에 만든 규정이고, 이미 낡았다. 학령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대학은커녕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다고 한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겸·초빙교원 활용비율을 확대하고자 한다.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면 그에 맞춰 교원 1인당 학생 수를 낮춰 교육환경을 개선해야 할 것인데, 교육부는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교육부에서는 겸·초빙교원 활용을 기존의 1/5에서 1/3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사실 겸·초빙교원의 확대는 대학의 숙원이었다. 대학은 꾸준히 교원 1인당 학생 수를 30명으로 개정하거나, 겸·초빙을 1/4까지 활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1996년 대학설립·운영규정을 만든 주역이기도 했던 이주호 장관은 이제 과감하게 이를 1/3로 확대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1996년 당시에는 대학이 교원확보율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은 사정을 고려해서 겸·초빙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해석해 주더라도, 지금은 학령인구마저 감소하고 있는데, 교육부와 대학은 교원확보율을 대학을 옥죄는 규제로 인식하고 이를 완화하고자 한다.

교원의 임무는 교육과 연구이며, 이것이 대학 본연의 임무다. 대학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학술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이 대학에 주어진 사회적 책무다. 물론 대학은 또한 학생들의 취업을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 이에 필요한 취업 실무교육에도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학문 연구를 뒷전으로 미루어버린다면, 이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 된다.

강사는 교원이고, 그 임무는 교육과 연구인데, 취업 실무교육과 특수한 교과를 교수하기 위한 겸·초빙교원이 확대되면 그만큼 학문후속세대 양성이 뒤로 밀려나게 된다. 겸·초빙교원이 늘어나면 신규 강사의 진입문이 그만큼 좁아지고 이는 다시 대학원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이미 강사가 없는 대학들이 많은데, 이들 대학에는 대학원이 없으며 그 대학들은 연구 역할을 포기한 지 오래다.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대학과,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는 교육부를 우리는 보고 있다.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들은 누구보다 자기 삶의 장기적인 전망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 가장 적합한 장소가 대학인데, 정작 대학은 하루살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심심한 사과’의 의미도 모른다고 한자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냥 꼰대 짓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특수한 교과’와 ‘일반교과’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학은 학문을 굽혀 세상을 어지럽힌 것이다. ‘심심한 사과’에 달린 댓글을 문해력 부족이라고 꾸짖는 배운 자들, 글쓰기 교과를 ‘특수한 교과’라면서 초빙교원을 뽑는 대학, 겸·초빙 교원의 비율을 확대하는 교육부, 이 모두는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래서 이건 태도의 문제이고, 염치의 문제다.

배운 자들이 세상을 더 크게 어지럽히니, 배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늘 높은 윤리의식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는 말인데, 양심의 자유를 강조했던 칸트는 ‘자유’를 자율로 해석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자율의 능력이 없는데, 스스로 보편타당한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을 따를 능력이 없는데, 교육부는 그나마 있는 규정마저 ‘규제’라면서 완화시키고자 한다.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는 자는 ‘심심한 사과’의 의미를 모르는 “요즘 젊은것들”이 아니라 대학과 교육부다.

그러니 요즘 젊은것들에 절망할 일은 아니다. 실로 걱정스러운 것은 퇴직하기도 전에 대학이 망해버리는 것은 아닌가를 걱정하는 나 자신이다.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 개혁, 특히 비정규교수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정규교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사소통과 일치」, 「해명·치료·언어투쟁」, 「비트겐슈타인 삶의 방식의 변경」, 「대학 구조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벼랑 끝 비정규교수」,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고용구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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