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찾아 항해하는 근대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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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찾아 항해하는 근대시의 세계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3.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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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 | 정과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532쪽

 

이 책은 월간 『현대시』에 연재한 글을 엮은 연구서로서 저자는 국내에 모더니티가 도래한 이후 현대시가 생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근대시’에 주목한다. 한국 근대시의 씨가 뿌려지고 네 개의 묘상이 형성되면서, 이 네 묘상이 자율적 운행을 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길항을 통해 한국 시 전체를 생장시키는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은 우리나라 근대시의 출발점인 김소월·한용운의 시 세계를 시작으로 김영랑·이육사·정지용·이상이 일궈놓은 근대시의 네 갈래를 점검하고, 오장환의 대표작을 톺아보며 마무리된다.

책의 부제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가 내포하듯 한국 근대시가 취한 최초의 원형적 자세는 ‘님 찾음’이었다. 〈0부 문턱에서〉는 그 ‘님’이 누구이며 어떻게 찾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한국 시를 규정하게 될 기본적 시의 묘상(苗床)이 구성되는 과정을 그린다. 한국 시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문학 텍스트를 관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근대시’의 시작점을 어디로 볼 것인지에 대해 저자는 흔히 ‘근대’라고 불리는 시기 이전부터 이미 근대문학의 태동과 문학적 시도가 존재했고 그 시기를 ‘선-근대’라고 다시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김소월과 한용운을 근대시의 출발점으로 이들 시에서 보이는 ‘기다림’의 정서를 ‘마중’과 ‘순수 기다림’으로 세분화한다.

〈1부 한국 근대시의 알뿌리[球根]〉에서는 0부에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의 대표 시에 대해 고찰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미련의 정서를 절묘한 내기의 창출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이별의 상황을 스스로 주도할 주체적인 개인의 자세를 빚어내었다”고 본 저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그의 산문집에 근거해 ‘님’이 소중한 존재이자 가련한 존재,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이며, 지금 부재하는 것이자 미래의 방향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설파한다.

〈2부 서정적 자아의 탄생〉에서는 ‘타자’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아’의 인식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화자가 낯설어하는 대상과의 경계를 허문 최초의 시로 이상의 「거울」을 분석한다. ‘나’와 같은 방향의 손을 내밀기에 악수도 할 줄 모르는 ‘거울 속 나’가 대치하는 상황을 통해 화자와 거울 속 인물이 타자가 아닌 ‘나’로 인식되는 순간에 주목한 저자는 근대시 이전의 시에서 ‘나’가 구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면, 이상의 출현 이후에는 ‘전체’이자 ‘나 자체’로서 인지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인식은 정지용의 「바다」를 건너 ‘서정성’으로 당도하는데,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필력의 유영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기다림’에도 ‘마중’과 달리 ‘적극적 모색의 방편’으로서의 정서가 있고, 이것이 한국 서정시의 기본 형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독서 인구 감소 및 쉽게 휘발되는 텍스트만 소비하는 실태에 탄식하면서도 문학평론가로서 가야 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겠다고 선언한다. 문학이 민족과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한,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에 씌어진 시들은 그 공표의 크나큰 질료이자 시작점이다.

〈3부 비극적 세계관을 넘어서 가기〉는 한국 시의 시원(始原)에 “언젠가는 그이가 오신다”는 명제가 깔려 있음에 주목하고, ‘님’의 부재로 인해 비극적 세계관이 녹아 있는 시들을 면밀히 검토한다. 저자는 비극성이 “시간의 부재에 처한 긍정과 부정의 동시성”임을 강조한다. 당시 조선인의 정서는 3·1운동으로 폭발했으나 일제 탄압에 의해 좌절됐고, 이런 정서와 비극적 세계관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 비극적 정서는 정지용의 건축 시학으로 마무리되는데, 저자는 “김영랑과 이육사로부터 구축된 시들이 ‘기다림’의 광경을 개척했다면 정지용의 시는 스스로 세상을 만드는 과정을 창안하였다”고 정리한다.

3부에서 얻은 결론의 심화 연구가 〈4부 모순어법의 세계를 열다〉에 드러나 있다. 대상에 의존하는 화자를 벗어난 또 하나의 방향에 이상이 놓여 있다. 난해함의 정수로 불리던 이상의 대표 시들, 〈오감도〉 연작과 「이상한가역반응」 「Le Urine」 「파편의경치」 등을 놓고 구조적 관점에서 하나씩 해체해나간다. 저자는 ‘어긋대칭’과 ‘모순어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상의 시편들이 현실에서 고통받는 화자의 이야기임을 분석해낸다. 덧붙여 이상의 세계관 속에서 “미래의 인간을 만나”는 신비로운 선험이 가능함을 설파한다.

〈5부 한국 이야기시의 등장〉에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녹아 있는 시편들을 탐구한다. “‘이야기시’는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된 시”로, 상처를 다스리는 처방으로 쓰는 것이 이 시론의 요체라고 역설한다. 특히 이야기하기는 ‘이야기’와 ‘시’를 구분하는 기준이며, 이야기시는 엄밀히 따지면 시나 소설과 다르다는 것을 백석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한다.

〈6부 ‘제3세계’라는 대안의 불가능성과 만남의 가능성〉은 “절망에 끝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다. 절망은 ‘만남’을 전제한 상황에서 대화가 단절될 때 찾아오며, 한국 시가 전통적으로 ‘대화’의 형식을 유지해왔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소통도 희망도 끊겨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하 문단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낸 오장환과 이용악의 작품들이 실렸다.

근대 시인들의 주요 작품은 중·고등 교과과정을 통해 그 의미와 특성을 암기하듯 이해한 탓에 ‘어려운 시’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이 책은 그 고착화된 인식을 깨고 근대시를 올바르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물론 현대시를 이해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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