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에서 재난·위기와 미의 관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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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에서 재난·위기와 미의 관계를 묻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3.1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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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과 감수성의 변화: 새로운 미 탐색 | 아시아 미 탐험대 지음 | 서해문집 | 400쪽

 

이 책은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에서 재난이나 위기와 미의 관계를 묻는 8편의 글을 담았다. 각각이 대상으로 삼은 재난이나 위기의 성격은 다르지만, 그에 직면한 사람들의 감수성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매한가지다. 저자들은 아시아의 넓은 시공간으로 관심을 넓혀 재난을 통해 새로운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고통에 공감하고 공생하는 미적 주체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출현한 사례들을 점검했다. 

이는 감수성이 전환됨에 따라 재난이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 작용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재난이 감수성의 전환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아시아적 폐허는 존재하는가〉는 폐허를 소재로 삼는 화가 모토다 히사하루(元田久治)를 다루었다. 현재 번성 중인 일본의 ‘명소’들이 폐허가 된 광경을 구상한 그의 예술세계에는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재난 경험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서구 예술에서는 폐허를 숭배하고 폐허를 통해 전통과 미적 기준을 상기하고 연속성과 지속성을 강조하려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 비해, 동아시아 예술에서는 폐허를 통해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과 애수, 비애와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모토다는 서구 경향에서 촉발되어 폐허 묘사를 시작했지만, 자연에 빗대는 동양적 폐허 표현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반향이 큰 것은 ‘폐허의 미’에 대한 공감의 증거일 것이다.

이어지는 〈천붕지해(天崩地解): 명청 교체기와 유민 화가들의 국망(國亡) 경험〉은 유교적 덕목인 충을 마음속에 남은 명나라에 투영해 위기감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비장의 미’의 진수를 짚어냈다. 한족의 명조가 만주족 청조로 대체된 정치적 사건은 당시 동아시아 엘리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명나라의 유민 화가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대참변의 위기를 고통스럽게 겪고 왕조 교체기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화폭에 옮기면서, 유교적 규범의 핵심인 충(忠)을 그림에 표현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참변을 겪고 난 조선 회화에서도 ‘충’으로 상승되는 ‘효(孝)’의 가치가 강조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후궁과 규방 그리고 기녀나 의녀 같은 여성, 가마꾼과 마부 같은 하층민을 새롭게 표상하는 그림 제재의 전환, 시각적 사고의 전환이 엿보인다. 이러한 미의 전환은 멸시받던 이들에 대해 선조가 지녔던 특별한 공감대에 힘입은 것임을 〈선조(宣祖)의 위기의식과 임진왜란, 그리고 그림 속 주인공이 된 여성과 하층민〉이 깨우쳐 준다. 전쟁으로 땅에 떨어진 국왕과 지배층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정치 위기를 넘어서고자 전쟁의 참화에도 장수한 노모를 잘 모신 관료들의 미담이 민심을 다독일 소재로 활용되었고, 가마꾼과 마부 등이 이러한 미담의 전파자로서 중시되어 그림의 소재로 등장했다. 

한편, 재난을 소재로 삼는 데서 더 나아가, 재난을 통해 얻은 미학적 가치를 재난 상황을 넘어서 일상적이고 보편적 건축 미학으로 승화한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의 작업은 단연 돋보인다. 경제적 쾌적함은 물론 검소하되 화려한 구조적 파격미를 성취한 그의 건축 미학은 단지 아름답거나 화려한 수준을 넘어서서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심미적 자부심을, 그리고 많은 사람의 눈과 마음을 쓰다듬으며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준다고 〈재난이 만든 아름다움, 반 시게루의 재난 건축〉은 역설한다.

〈고통의 아포리아, 세상은 당신의 어둠을 회피한다: 재난(고통)은 어떻게 인간을 미적 주체로 재구성하는가〉는 고통받는 자가 상처받은 영혼을 지탱하는 것은 일상에서, 기억 속에서, 무의식의 저층에서 물결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 덕이라고 읽는다. 이런 점에서 고통받는 자는 어둠의 깊이를 발견한 자며,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영성과 해후하는 자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은 공감하며 공생하는 미적 주체의 출발점을 알리는 감성의 신호탄이 된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자를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종들로 시선을 넓혀 양자가 깊이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우리 시대의 뜻깊은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다. 〈기후 위기와 생태적 슬픔(ecological grief): 수치와 희망의 세계〉는 기후 위기 시대에서 기후의 감정화가 일어나는 맥락을 살펴보고, ‘생태적 슬픔’과 ‘연루된 공감’ 개념에 주목한다. 생태적 슬픔은 상실한 것을 애도함으로써 정동화된 연대감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고, 연루된 공감은 기존의 동물권 운동을 넘어, 인류가 어떻게 비인간 종들과 공감하며, 이들의 요구·이해·욕망·취약성·희망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촉진한다. 

〈위기의 시대, 북한의 문예 정책과 ‘웃음’의 정치〉에서는 위기에 처한 북한의 문화정책이 숭엄미에서 ‘웃음의 정치’로 바뀐 것을 예민하게 관찰했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위기의 시기에 인민들에게 웃음을 준 예술선전대들의 화술소품(만담과 재담극)에 인민이 참여함으로써 감화되는 방식, 이를테면 감정적 연대를 조성한 ‘관계의 미학’을 발견한다. 10분 내외의 짧은 코미디 안에서 관중이 함께 웃음을 터트리는 부분은 북한 사회 내에서 부끄러워야 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글인 〈카디, 죽지 않고 살아 있(남)는 아름다움〉은 역사와 문명이 단절될 위기에 처한 20세기 인도에서 제국주의 영국이 부과한 아름다움과는 다른 대안적 아름다움을 ‘카디’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2020년대를 맞은 오늘날 패션의 아이콘이자 도시 유행을 선도하는 현상까지 주목한다. 카디는 간디가 스와데시운동, 곧 국산품을 포함한 ‘우리 것 사랑’ 운동 차원에서 선양한 것으로 물레를 돌려 자아낸 실, 그 실을 가지고 손으로 짠 옷감 그리고 그 옷감으로 만든 의복을 모두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와 밀려오는 다국적 의류산업에 밀려날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카디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효율성을 앞세운 공장제품과 다른 투박한 미가 탈근대적 시대 요구에 부응했기에 오히려 소비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인도의 미적 인식과 문화 다양성이 반영된 카디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위기를 넘어 살아남은 아름다움의 사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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