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②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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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②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03.1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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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평론]

 ■ 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②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가마쿠라 막부를 이은 무로마치 막부

신불교와 유교, 병학-무사도의 ‘이이토코토리’
- 무위국가(武威國家)의 무위이치(武威而治) -

한중 유교국가에서는 유교 이상주의로써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것과는 달리, 유교보편의 사상체계에서 거리를 둔 일본은 신불교를 주축으로 하고 유교 현실주의와 병학-무사도 사상을 습합하여 무위이치(武威而治)를 지배기제로 운용하는 무위국가(武威國家)를 건설하였다. 일본의 ‘이이토코토리’ 문화는 하나의 보편에 충실한 한중과는 다른 공리주의적인 일본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메이지 시대는 이러한 ‘무위국가의 무위이치’가 가장 극적으로 개화하여 외면적 성공을 거두었다. 

신불교 신앙이 우선했던 이념적 배경 외에 일본에서 유교가 주류가 되지 못한 원인으로 지배구조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세습호족연합세력은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받들어 현실정치에서 분리시킨다. 따라서 군주 중앙집권하에서 군현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세습무가호족의 봉건제가 지속되었다. 유교는 왕권 중심의 군현제, 과거제, 관료제를 지향하는 특성이 있다. 자연히, 세습호족세력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불교와 호혜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신불교의 비이성적인 종교성은 천황을 향한 무조건 충성심에도 도움을 주는데,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진 시기는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이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 세습무가호족세력이 지배하는 ‘무위국가’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신불교, 유교 윤리가 무사도와 습합하여 생성된 윤리와 예법이 존중받았다. 이른바 일본의 ‘무사도’는 고래의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정신으로 내려오면서 점차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며 내면화하였다. 이것은 유교나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일본인의 사고체계를 뒷받침하는 정신이며,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정신이나 지혜, 용기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일본의 무사도라고 칭하는 야마토다마시이 정신이 독자적인 일본 문화인 것은 한-중 유교국가와 비교하면 두르러진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세속오계’ 윤리에는 유교와 불교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로는 문치주의가 우세해지고 조선이 유교화하면서 문화적으로 내면화하지 못하였다. 중국에서도 묵가사상에 무사와 협사의 정신이 함유되어 있었으나 유교가 독존하게 되면서 묵가는 비전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무사도가 메이지 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게 된 것은 유교화와 문치주의가 거의 기능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추론할 수 있다. 

대화(大和)는 운명공동체인 일본의 정신과 영혼을 바탕으로 화합하자는 것으로 개인보다 일본이라는 집단을 우선한다. 또한 조화와 통일을 의미하는데 그 중심은 천황이다. 무사도와 대화혼 정신은 일본인 특유의 문화, 정신,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국학을 제창한 노리나가는 유학자의 한학숭배와 중화사상에 대항하여 ‘야마토고코로’(大和心)를 강조함으로써 일본의 주체적 문화를 주창했다. 대화혼이 초기와는 달리 군국주의, 침략주의와 연결된 것은 메이지 시대이다. 이후로 점차 극우사상의 토대가 되었고, 나아가 일본의 문화적 우월감, 인종적 우수성,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연결되어 동아시아 침략주의를 미화하는 사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대화혼이 가장 기묘하고 음울하게 드러난 사례는 군국주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할복(1970년)한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정신구조이다. 나는 그의 기묘한 사상과 정서가 일본의 ‘작위적 보편사상과 문화’의 전형이자 결과라고 보고 싶다.

일본인의 무사도 정신에 모범으로 굳게 자리 잡은 3인은 모두 신불교 문화, 무위정치와 연관이 깊다. ‘천하포무(天下包武)’를 기치로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신불’의 마음으로 에도 막부를 건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근대화와 동아시아침략의 문을 연 메이지 천황이다. 

 

                                     (왼쪽부터)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메이지 천황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의 유교적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제정한 ‘무가제법도’(1615)에는 법가와 병학을 습합한 내용이 있다. 이것이 지향하는 바는 무위이치를 지배기제로 확립하고 무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막부정권의 위용을 굳건히 하기 위해 천황을 상징으로 옹립하고, 세습무가호족들은 ‘참근교대’를 통하여 견제하고, 백성은 각자의 신분에 따른 ‘야쿠’(役, 역할)를 부담하게 하였다. 이로써 에도 막부 무위국가의 무위이치는 체제의 질서를 위해 위로는 ‘천황을 받들고’, 아래로는 ‘호족과 백성의 자율성’을 통제하였다. 

추론하면, 한중 유교국가에서는 주자학의 엄격한 윤리체계로 ‘판옵티콘 감시사회’를 구성하였으나, 일본은 신불교와 유교, 병학-무사도가 습합한 ‘무위에 의한 감시사회’이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와 에도 막부의 ‘무가제법도’는 이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일본이 무위국가라는 것은 유교적 인격수양과 위민정치를 우선하여 논하는 한중의 유교적 지식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다. 그 예로 일본에서는 유교적 지식인들마저 병학을 거의 필수적으로 논하고 있다. 

야마가 소코(1662~1685)는 주자학의 비실용성을 비판하고 신도와 병학사상을 기초로 한 《신론》에서 국체론을 폄으로써 무위국가를 구상하였다. 이는 후기 미토학이 내포한 신도와 존황이념의 기초가 되었다. 1710년경 ‘정덕의 치’(正德の治)를 주도한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을 천황이 아니라 막부가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무위의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 중화라는 민족주의적 기상과 조선멸시론을 제창하면서, 이후 메이지 시대 국가주의적 근대화와 침략주의에 복선을 조성하였다. 동아시아 시각에서 소코와 하쿠세키는 오늘날 전형적인 보수우익 일본 정치꾼의 선조가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는 병학자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이 《손자병법》의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중에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 아라이 하쿠세키, 야마구치 슌스이, 오규 소라이, 가와다 도고(이토 진사이 학파), 이토 호잔(절충파 학자) 등인데, 한중 유학자들에 비하면 대단히 실용주의적 경향성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고문사학을 제창한 유학자 소라이도 《손자국자해》(1750년)를 출간하여 병학을 논하였다.

주자학에서 란학으로, 다시 병학으로 다방면의 학문적 관심의 폭을 넓혔던 사쿠마 쇼잔(1811~1864)은 서양의 기술을 배워 국력을 증대할 것을 주장한다. 일본 해군을 창설했던 가쓰 가이슈와 사카모토 료마, 동아시아 침략사상의 원조격인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사상사적 변화의 방법론인 ‘습합과 이이토코토리 문화’를 실천한 선구적 행동가들이다. 

마루야마는 에도 막부 시대를 어떠한 외침이나 내부의 반란사태가 일어나도 하루아침에 전시 총동원체제를 발동할 수 있는 통치조직이 완비되었던 시대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점에서 막부와 메이지 시대 일본은 무위로 통치하는 무위국가 혹은 병영국가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이른바, 한-중 유교국가에서는 주자학적 문치주의 사고체계가 군주와 사대부, 백성을 지배 훈육하는 왕조국가를 구성하였다. 그렇지만, 역으로 일본에서는 천황과 세습무가호족이 필요에 따라 신불유교 사상에 병학-무사도를 습합하여 수행한 무위이치에 의한 무위국가를 건설했다. 즉, 보편사상이 국가와 지배체계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무위국가의 무위이치가 공리적 필요에 따라 습합의 사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일본의 작위적 사상-문화적 특성은 메이지 시대에 잠시 벚꽃처럼 만개하였다가 금방 낙엽이 되어 땅바닥에 추락한다. 

 

메이지 시대, 참을 수 없는 일본식 작위의 가벼움
- 기묘한 습합과 작위적 보편의 침략주의 -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는 신도+무사도+유교+서구적 근대화를 습합하여 이루어졌다. 서구적 근대의 얼굴(겉모습)은 ‘근대화’이고, 그 내면의 정신적 가치는 ‘근대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일본은 겉모습을 열심히 화장했지만, 내면의 가치를 배우기에는 정신적 성숙도가 너무 미천하였다. ‘근대성’에는 근대의 밝은 측면인 ‘주체적 자아, 개인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내포되어 있는데, 일본이 재빨리 배운 것은 근대의 어두운 측면인 ‘국가주의와 부국강병, 진화론적 우승열패주의’였다. 이것은 서구적 근대의 긍정적 측면인 ‘내면적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일본은 서구의 얼굴을 닮으려고 하는 ‘서구화’에 매진하여 단기간의 성공을 이루었다.

당시 일본의 엘리트(지식인과 정치꾼)는 서세동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서구화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감지하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쇠퇴하는 청-조선을 제압하여 동아시아의 ‘신중화제국’으로 등극하려는 의도를 점차 증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메이지 유신은 국가이념에서 불교를 배제하고 천황 중심의 신도를 국교로 세우면서, 동시에 서구적 근대화를 습합하여 국가발전 이념으로 삼는다. 천황에 대한 신도 신앙적 충성심을 무사도(대화혼)의 실천윤리로써 뒷받침하면 서세동점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신불교 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하던 일본에서 갑자기 불교가 국가이념에서 제외당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일본은 ‘국체로서의 천황’을 보존하는 게 시급한 과제로 다가왔다. 그런데 불교는 유일한 숭배 대상인 부처가 존재하고, 개인적 해탈을 중시하는 보편종교의 원리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국가적 통합의 사상으로서는 부적합했다. 반면에, 공동체의 화합을 강조하는 신도는 하나의 경전과 유일한 숭배 대상이 없어서 천황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하는 국교로 삼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유리했다. 따라서 당시 국가이념에는 천황이 신도의 중심이 되어 국가의 상징이 되고, 대정봉환으로 실권을 양보한 무가호족세력의 무사도가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실천윤리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메이지 국가이념의 개혁에는 이미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길을 정초하고 있었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세습무가호족 연합정치의 봉건제를 해체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하면서 천황 중앙집권체제(군현제)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변혁은 유교화-정치발전의 한 측면이다. 따라서 학자에 따라서는 메이지 유신을 일본 유교화의 부활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불교를 소거한 자리에 천황에 대한 신도의 종교적 충성심에 유교의 강상윤리와 충군애국을 ‘교육칙어(1890)’에 추가로 강조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기능적인 수용에 불과하다. ‘교육칙어’ 이전에 ‘군인칙유’(1882)에는 병사와 장교들이 일심동체로 국가의 정점인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곧 애국심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메이지 국가이념의 실천윤리는 무사도(대화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양대 칙유의 공통성은 일본(국가)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병사와 국민이 수족이 되어 두뇌인 천황(국체)에게 충성을 바치는 유기체적 인식론이다(김태진, 이노우에 테츠지로). 일본은 서구의 기계론적 인식론에 흥미를 갖고 ‘란학’(특히 인체해부학)을 발전시킨 바가 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 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하면서 여전히 동양적 유기체적 인식론을 국체의 원천으로 삼고 그와 대척적인 기계론적 인식론을 습합하고 있다.

                                         (좌) 군인칙유(軍人勅諭)와 (우) 교육칙어 (教育勅語)

그러나 이러한 ‘좋은 것은 취한다’는 공리주의적 방법은 그 ‘작위성’으로 인해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른바. 메이지 천황을 국체이자 신도의 신으로 추대한 국가이념은 서구적 자유화 사조와는 충돌한다. 따라서 일본은 천황 신격화에 의한 국가적 통합, 서구적 근대화의 부국강병, 서구적 근대의 자유화라는 3자 간의 긴장에 휩싸였다. 게다가 막시즘까지 이 사상적 갈등에 합세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심각했던 긴장은 일본이 신속히 서구화하여 서세동점에 저항하고 동아시아를 수호하는 데 앞장설 것인가, 아니면, 서구화의 어두운 측면을 모방하여 탈아입구와 침략주의를 추진하는가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평화 지향적인 유교보편이 모자랐던 일본은 거의 주저치 않고 서구제국주의를 모방하였다. 

이러한 사상-문화적 특성은 동아시아 유교 보편사상이 제시한 윤리체계와 정치발전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습합한 사상-문화만을 고수하던 일본의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한다. 일본의 정신세계는 ‘좋은 것은 대척적인 것까지도 기꺼이 습합’하는 공리주의로 인해 ‘하나의 영속적 보편사상이 부재한 사회와 문화심리구조’를 구성하였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작위적 보편사상을 구성한 천황이념-신도는 유교-서구화와 대척적이고, 유교는 신도-서구화-무사도와 대척적이다. 또한 당시 습합의 대상은 아니지만 좌파사상은 이 모든 사조와 갈등적이었으나, 결국에는 천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 기묘한 습합이 가능한 게 ‘탈아입구론’(후쿠자와 유키치)이 보여주듯이 일본은 아시아와 유럽을 필요에 따라 왕복할 수 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인지부조화의 사상적 긴장을 해결하려면 ‘사회적 공론장’에서 다양한 토론이 자유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탄생한 일본제국은 그러한 민주적 공론(자유민권운동, 학생운동, 좌파사조)을 경계하고 탄압했다. 따라서 메이지 이래 일본이 정신적인 부조화와 자유를 향한 욕구불만을 해결하려면 고속 경제성장과 대외적 침략주의로 무조건 돌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외양의 급속한 근대화 이면에는 ‘필요하면 다 갖다 쓰는 사상들 간의 긴장’이 상호작용하면서 폭발성을 축적하고 있었다. 마치 지진의 폭발력이 지표면 아래에서 계속 증대하여 어느 날 ‘진주만’에서 터진 것처럼. 

나는 이러한 외재적 비판론을 배경으로, 메이지 유신은 무위국가 일본을 경제-군사적인 급속 발전으로 인도했지만, 동시에 그 내면에는 급속 패망의 복선을 담고 있었다고 논한다.

일본은 외부세계와 고립된 자기 충족성을 가진 섬나라이다. 한반도를 통하여 중국 문명을 수용하지만, 유교화-정치발전이라는 보편의 길을 따르기보다 일본의 특수성인 신도-불교 습합을 통해 자기 고립적인 사상-문화적 심리 구조를 내면화하였다. 이른바 동아시아 보편사상인 유교적 정치발전이 부재했던 메이지 일본은 작위적으로 습합한 사상을 보편이념으로 급조하여 침략주의를 통해 동아시아에 확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작위적 보편사상은 일본의 국경을 넘어 수용되고 보편화한 적이 없다. 

이러한 세기말의 불온한 상황은 학술서보다 문학작품이 더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메이지 일본의 작위적 사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번민했고, 상대적으로 이른 죽음을 맞이한 두 작가가 있다. 

아쿠다가와 류우노스께(왼쪽)와 나쓰메 소세키(오른쪽)<br>
아쿠다가와 류우노스께(왼쪽)와 나쓰메 소세키(오른쪽)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동시대의 작위적인 보편사상과 함께 살아가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긴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음》과 《그 후》는 환경에 대한 순응적 개인과 ‘자기 본위’의 근대적 개인 간의 긴장, 집단에 대한 편승의 겉치레 마음과 자신만의 진심 사이의 긴장 상황을 묘사하면서 무엇이 선악이며 진실한지에 대해 해답을 주지 않거나 또한 못하고 있다. 소세키는 마음의 근대적 긴장을 자각한 세기말적 경계인이며, 개인의 주체를 의식하지만, 그것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회적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외로움과 괴로움을 가지고 살았다. 

이러한 소세키와 비슷한 시대의 문학적 감성을 가진 아쿠다가와 류우노스께는 <신들의 정원>에서 일본은 어떠한 외래사상도 습합을 통해 재창조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자부심의 태도와는 달리, 자신은 의문의 자살(1927)을 하고 만다. 탈일본의 동아시아 시각에서, 소세키에게서는 찾기 힘든 일본 정신세계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고려하면, 자살은 순전히 개인의 정서적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찬미했던 일본이 자주적으로 외래사상을 일본화하거나 또한 상호 모순적인 사상들을 기묘하게 습합하는 것을 자신은 왜 못하고 이른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동아시아 시각에서, 《마음》의 선생님과 아쿠다가와의 ‘자기부정’(자살)은 작위적 보편사상의 구조가 출산한 마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주체 의식의 허약함에 대한 ‘자기 처벌’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작위적 보편사상이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에서 보편으로 승인되지 못한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와 세계에 보편적인 가치와 사상을 배우고 수용하기보다 자신만의 특수성에 단편적 필요성으로 선택한 외래의 것을 짜깁기한 ‘작위적 사상’으로는 나의 경계를 넘어 보편화시키지 못한다. 더구나 사상의 보편화는 상대의 자발적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침략으로 이룰 수는 없다. 세계는 영-미 제국의 침략성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생산한 정신문명의 밝은 측면에 공감하는 것이다. 유교와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보편 가치체계에 공감하는 세계가 메이지 일본의 기묘한 습합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발, 일본 정치꾼들처럼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종교의 자유’라는 ‘작위적 보편의 가면’을 씌우지는 말자. 


메이지 시대, 작위적 보편의 총화: 동아시아연대론

메이지 시대 일본은 고전시대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동)아시아를 중요한 주제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상기한 바대로, 메이지 유신으로 창출한 작위적 근대화 사조를 내발적인 동아시아 보편사상으로 삼아 그것으로써 일본 중심의 신중화주의 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시대 다수의 지식인과 행동가들이 동아시아론을 제창하고 중국과 조선을 배회하였다. 그러나 평화적 연대로 서구에 대항하자는 그럴싸한 동아시아론은 일본의 인지부조화로 인해 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위선으로 귀착하고 말았다.

 

                                       후쿠자와 유키치(왼쪽)와 오카쿠라 덴신(오른쪽)

당시의 동아시아 사조를 해부하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탈아)과 오카쿠라 덴신의 ‘아세아일체론’(흥아)의 두 경로가 있다. 그런데, 이 두 길은 한 동전의 양면으로 다르지만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 이른바, 탈아는 서구에 편승하여 침략주의를 통해 동아시아를 개명하고, 또한 흥아는 동아시아를 주도하면서 개명시킨다는 같은 의미를 표방한다. 결국, 탈아론과 흥아론은 일본의 동아시아침략 동기를 정당화하는 ‘대동아공영권’의 복선을 조장하고 말았다. 

야마무로 신이치에 의하면 일본은 아시아에 속하면서 아시아가 아니라는 배치된 위상을 근대 초기에 추구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은 자신이 아시아에 있다는 것과 자신이 곧 아시아라는 것 사이에서 분열되어 ‘자가중독’을 일으켜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점차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한 지향으로 발전했다. 즉, 서구를 가장 빨리 모방한 근대화의 우등생으로서 동아시아의 중화가 될 수 있다는 이념을 온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념화의 결과로 생성된 침략주의는 이후 일본이 하부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동아시아사상을 구성하였다는 비판을 맞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덴신이 ‘(동)아시아일체론’을 주창하면서도, 결국 일본의 근대는 서구를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렇게 일본의 근대화는 동아시아의 부분에 불과한 일본의 원래 얼굴에 서구의 가면을 씌우는 성형수술의 방법으로 전개되어 온 것인데, 전전에는 소세키의 ‘자기 본위’의 문제의식에 투영되었고, 전후에는 이러한 모방적 근대화에 대해서 다케우치 요시미, 미야지마 히로시, 고야스 노부쿠니, 사까이 나오끼 등이 비판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국에서 등장한 동아시아사상과 일본의 작위적이고 침략주의적인 동아시아사상의 차이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충돌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러일전쟁 이전에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 지지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전후에 조선을 합병하려는 시도를 목도하면서 일본의 동아시아연대론이 결국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속임수였음을 깨닫고 그 주모자인 이토를 징계했다고 밝힌다. 그는 어디까지나 동아시아 국가들이 상호수평적인 연대로써 근대화에 앞선 일본을 배우면서 연대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동아연대론은 침략주의를 근저에 담고 있었던 것이 전후 주권침탈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면서 드러났다. 즉, 안중근의 ‘의거’는 그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동양평화론’과 이토를 대표로 하는 ‘일본 중심의 침략주의적 동아시아론’이 극단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후에 등장한 일본의 동아시아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절적 조망이다. 냉전시대 ‘대동아공영권론’의 허장성세를 자책하는 일본 지식계에서 동아시아를 거론하는 것은 패전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60년대 다케우치 요시미는 용감하게 메이지 시대 이래의 일본의 동아시아론을 ‘역사의 구조(연대)와 현상(침략)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재평가하였다. 이른바, ‘연대론의 동기와 침략 행위’를 분리하고, 이어서 연대를 추구했던 일본의 주체성을 동아시아의 원리로 읽어내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작위적이고 위선적인 것은 연대론을 주창한 동기는 일본식의 순수함으로 존숭하고, 침략이라는 행위를 한 것은 일본이 주체성을 잃고 서구를 맹목적으로 모방한 결과라고 하는 것에 있다. 즉, 연대의 동기는 일본적 순수함의 표현이고, 침략행위는 맹목적 서구모방의 결과로 비판하는 척하면서 침략의 책임을 일본이 아닌 서구적 근대로 떠넘기고 있다. 이렇게 메이지 일본의 동아시아사상은 동기적 측면에서는 순수함으로 남게 되었고, 침략은 서구적 근대성에 전가되고 말았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다케우치의 분리적 접근법을 순수한 학문적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른바, 메이지 일본의 동아시아사상을 침략주의라는 한 흐름으로만 바라보면 놓칠 수 있는 게 있어서, 여러 각도에서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 학문적인 순수한 동기로 평가받으려면 일본 사회의 ‘진솔한 반성’이 있은 연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분석적 태도가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일본 사회에서 아직도 구체적으로 독일 수준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아직도 불신의 감정으로 일본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오케하자마 전투(일본어: 桶狭間の戦い)는 에이로쿠 3년 5월 19일(1560년 6월 12일),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 오와리국의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고작 2천 기의 병사들로, 침공해 온 슈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수만 대군을 격파한 싸움으로 일본 전국시대 3대 기습의 하나로 꼽힌다.

서세동점에 대응하기: 오케하자마 전투의 재현과 패배 

사상사적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에서 변화의 물결에 대처하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순자유교와 상통하는 왕안석의 변법 개혁주의와 사마광-주자의 인격 수양주의이다. 그런데 역사상 유교국가에서는 전자가 권력정치에서 후자에게 승리한 적이 거의 없다. 조선의 실학과 개화사조도 황야의 외침으로 끝이 났고, 청조 홍양길의 ‘인구론’과 허내제의 ‘이금론’은 주자학적 관료들의 반발로 무시되었다. 

중국과 한반도 왕조들이 성패와 관계없이 실용적 변법개혁과 군사적 기회주의를 대외적으로 발휘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특히 인격 수양주의에 근거한 주자학적 지배기제의 내부 안정지향성과 대외적 평화주의, 자기 충족성의 세계인식은 외부세계로의 진출 의욕을 약화하였다. 또한 서구의 교역 요구와 그 충격적 결과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는데, 서구의 폭력성은 준비하는 시간을 주지 않았고, 따라서 경험의 실제적 결과는 비참했다.

일본만은 예외다. 소라이학과 란학은 순자의 현실주의 유교와 양명학의 일본식 버전이다. 게다가 일본의 무위정치 사상은 강한 적을 대할 때는 편법과 기회주의를 염치없이 이용할 수 있다. 노부나가는 압도적으로 강한 적(이마가와 요시모도)을 대했을 때, 적장 하나만을 기습적으로 죽이는 전술을 사용하여 자신의 인생 초반 출세작인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막강한 페리함대를 대했을 때, 막부는 납작 엎드렸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였다. 메이지유신의 서구화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 침략과 진주만에서 선전포고 없는 오케하자마 기습전술로 승리하였지만, 마침내 태평양전쟁에서는 대패했다. 이른바, 신불교 문화의 주술성, 기능적 유교수용으로 인한 보편윤리 의식의 미약함, 무위국가의 실용성과 기회주의를 가장 잘 반영하는 역사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막부정권이 쇠퇴할 시기임에도 개명된 대외의식으로 재정이 튼튼했던 일부 무가호족(사쓰마, 조슈, 도사) 세력은 천황을 대안으로 막부타도를 전개하면서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천황을 국체이자 동시에 국가신도의 주체로 추대하면서 반역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애국자의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현실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면 무가호족인 자신들 간의 주도권 싸움을 포기해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며, 일본이라는 전체 영화관(국체, 정체성)을 부수지 않고도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황을 옹립하는 유신정부를 출범시키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새로운 국가발전 사조를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 사조는 막부 일본의 호족연합체제를 해산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를 기치로 재결집한 ‘천황-국가주의 연합체제’이며 서구에서 틈입한 자유민권운동과 좌파사상의 도전을 물리치고 다수의 전쟁(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도 승승장구한다. 이후 천황-국가주의 연합은 강고하게 발전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일대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전후 미국의 동아 패권전략에 재빨리 편승하고 탈아입미 변신술에 성공한다. 천황-국가주의 연합과 그것에 호응하는 보수우익 사조는 경제 부흥기인 60~80년대 효력을 복원하는 듯했으나, 90년대 이래로는 오히려 일본을 후진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원인으로 변질한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과거의 성공 요인은 오늘날에는 실패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미래를 위해서는 자기성찰과 변혁이 필요하지만, 일본은 과거 한 때 특정 상황에서의 성공의 측면만을 과신하는 부작용을 오늘날 맞이하고 있다. 요나하 준은 이러한 일본을 여전히 ‘중국화’(유교화)를 통하여 ‘세계화’라는 보편의 길을 따르지 않았던 구태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며 자아비판하고 있다. 그 의미는 ‘유교화-정치발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호족연합 정치체제를 해체하고 동아시아 보편인 유교화와 세계적 보편인 글로벌화의 정치발전을 걸어야 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오늘날의 일본은 봉건시대와 같이 호족연합 지배체제와 그에 상응하는 보수우익 사조와 세계관에 머물러 있다고 한탄한다. 천황-세습호족 자민당 연합의 보수우익적 지배체제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변혁이 힘들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에 미세동점이 개입하여 미국과 천황제+보수우익 연합이 겉으로는 상호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맹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만적 분리지배기제’(사카이 나오키)가 일본 정치와 역사인식을 왜곡시키고 있다. 

 

                                                             천황의 즉위식 모습

스크루우지는 미래의 자신의 묘비명을 보아야

결론으로서 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추구의 부침을 평가해 본다. 

진정한 화이변태는 동아시아 역사상 세 번 일어났다. 위진 남북조, 송대의 요, 금 왕조는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후 몽고족의 원조와 만주족의 청조는 유교국가 중원과 한반도를 모두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일본제국이다. 

그런데 세 번의 중심-주변의 역전은 그 배경이 비슷하다. 결정적인 것은 중화제국과 그 문화적 숭배자인 한반도가 모두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시기에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은 바다로 격리된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인해 대륙과 한반도의 풍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몽연합군은 일본에서 두 번 실패했고, 명-청이 명운을 걸고 맞붙은 사르후 전투에 조선처럼 참전을 강요받지도 않았다. 청과 조선은 유교적 중앙집권체제가 쇠퇴하여 대안세력이 부재한 상태에 들어서는데, 그간 고립적이던 막부체제가 쇠퇴하자 우연하게도 일부 재정이 튼튼한 무가호족 동맹이 천황이라는 대안을 활용하여 근대화로 재빨리 진입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시각에서 상기하고 싶은 것은 세 번의 화이변태로 등장한 제국의 통치가 철저히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원조는 유교화 발전에 서툴렀고 자생적인 문화를 창달하여 보편화하는 것도 실패했다. 단지 동서양에 걸친 팽창으로 인해 중원의 우수한 문화적 발명들이 서구로 전해지는 데 의도치 않게 공헌하였다. 청조는 유교적 정치발전을 이루는 데 성공하고 고증학이 발전하는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청조는 중화문화에 철저히 동화하는 바람에 역대 중화제국의 자기충족적 세계인식에 자신을 가두면서 동귀어진의 길을 가고 말았다. 

일본은 역사를 통해 유교적 정치발전이 미약해서 서구적 근대화와 침략주의를 신속히 모방하는데 중국-한국보다 사상적 고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기 일본적 정신세계의 특성으로 인해 일본 국경을 넘고 동아시아에 걸쳐 자발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창출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제국의 신중화제국몽이 청-조선의 혼란을 틈탄 침략주의로 행해진 경솔한 꿈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전후 동아시아 상황의 전개가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메이지 유신은 동아시아와 세계에 어떠한 긍정적인 보편적 가치와 문화적 메시지를 창출하지 못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건설한 일본제국은 ‘군국주의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유산으로 남기는 데 그쳤다. 불명예스럽게도 전후에 이 용어는 박정희, 이광요, 장경국, 마르코스 개발독재의 지배이념으로 유령처럼 동아시아를 떠돌다가 사라졌다. 

나는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고 자기 변혁을 외치는 일본인을 좋아하는 친일파다. 미우라 아야코는 전쟁을 옹호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전후에는 교사직에서 물러나 기독교에 귀의한다. 40년대 중반 여교사의 사회적 지위를 상기하면 대단한 회심이다. 신불교 사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그렇다. 탈정치적인 그녀의 작품에서 기독교적인 원죄 의식과 용서는 조국인 일본을 향한 기원이 아니었을까.

또한 내가 존경하는 비판적 지성이자 노벨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가와바다 야스나리 문학과 결별하였다. 이른바 “일본의 아름다움과 슬픔만을 쓴다”라는 너무나 일본적인 문학세계를 떠나 세계적 보편정신(침략사의 사죄, 천황제 폐지론)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세계적 보편성을 표방한 작품에 수여하던 노벨상을 가와바다에게 수여한 것은 일종의 세계 문학계의 예외였다. 그래서 오에는 《설국》의 일본적 정서를 노벨상이 보편화하려는 작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주목할 것은 영국 군주제와 오에가 거부하는 일본 군주제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영국인은 왕실을 영국관광 홍보대사 정도로 여긴다. 천황은 ‘신도-무위 국가의 영원한 주군이자 신’이다. 파파라치들이 영국 왕실 가족의 비키니 사진을 찍어 보려고 난리 치지만, 일본 왕실 가족은 기모노 말고 무엇을 입는지를 대중들은 몰라야 한다. 오에가 폐지를 주장하는 천황은 사람이 분장한 ‘작위적 신’이지 관광 홍보대사로서의 소박한 ‘사람 천황’이 아니다. 

우리가 존중하고 경외할 수 있는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독일처럼 진솔하게 반성하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따르는 일본이지, 지금처럼 천황-보수우익이 미국에게 ‘꺼삐딴 리’(전광용)가 되어 중국을 견제하고, 한국과는 친한 척 쇼를 벌이면서 뒤에서는 등쳐먹으려 하는 소아병적인 일본이 아니다. 

일본의 작위적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는 지표는 상호 모순적인 사조를 동시에 추구하는 인지부조화와 지행부조화의 행태이다. 신도-무위국가를 자부하면서도 서구적 근대화에 매진했고, 동아 침략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동아연대론을 내세웠다. 탈아입미의 얼굴을 하고서도 동아연대의 맹주를 가장하려는 속셈과 표정의 비대칭 상태를 ‘국체보존과 천황을 위하여’라는 큰 틀 안에 모두 습합하여 정당화하려는 ‘작위적 망탈리테’가 일본 정신세계의 근저에서 호흡하고 있다.

일본의 사상적 회심을 촉구하면서 한마디 하자면, 동아시아의 스크루우지 영감이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유령만이 아닌 미래의 자신의 묘비명을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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