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ㆍ허세ㆍ헛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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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언ㆍ허세ㆍ헛가락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03.0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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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학문을 한다면서 허언ㆍ허세ㆍ헛가락을 일삼는 녀석들이 있다. 녀석이라는 비속어를 쓴다고 나무라지 말기 바란다. 입이 험하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도움이 되는 소리를 하고자 한다.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허언은 사실과 다른 거짓말이다. 예를 둘 들어보자. “한국에는 서사시가 없었다.” “한문이 소설 창작을 방해했다.” 이런 허언은 사실을 확인하면 금방 들통이 난다. 허언을 되풀이하면 정신적 신용불량자가 된다. 

허언은 하수가 애용하는 저급한 사기술이다. 고수라고 자처하는 녀석들은 이렇게 규정한 허언을 우습게 보고, 그 상위의 허세를 선택한다. 허세는 허언처럼 명백한 본보기를 들기 어렵다. 특징을 묘사해 “그런 것이로구나” 하게 알게 하는 작업과 비판적 논의를 함께 해야 한다. 

허세는 그럴듯한 말을 부풀리고, 작은 성취를 크게 자랑하는 작전이다. 허언을 조작할 때보다 머리를 더 써야 가능하고, 사기 행각이 오래 간다. 허세가 먹혀들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일단 알아주어야 한다. 존중하면서 접근하고, 자세하게 진단해야 한다. 상당한 정도의 유식한 말이 필요하다.

허세가 무엇인지 논의를 더 좁혀 말해보자. 사기를 은폐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이 허세이다. 기존의 연구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단죄하고,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기상천외의 소리를 대뜸 해야 명성을 떨칠 수 있는 허세이다. 우상숭배가 필요한 무리를 속여 대석학이라고 받들도록 하는 작전까지 갖추어야 성공한 허세이다. 

성공에 필요한 작전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자. 기상천외 소리의 타당성을 논증하려고 하면, 충격이 줄어들고 김이 샌다. 모여든 사람들도 골치 아프다고 여기고 흩어진다. 그 대신 택하는 세 가지 비결이 있다. 언성을 높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과장법을 최상의 수사법으로 한다. 

하는 말은 언제나 서론에 머문다. 서론에다 온갖 잡담을 보태 시간을 끌면서 본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것은 본론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내막을 감추는 위장 전술만이 아니다. 서론에는 귀를 기울이고 본론이 시작되면 지겨워할 신도를 확보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아직 말하지 않은 본론에 대한 기대가 아직 가보지 않은 천국에 대한 기대만큼 커지게 할 수 있는 고도의 술책이다.

헛가락은 허세가 고차원한 작전이라는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허세는 학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장외경기를 제패한다고 뽐내기만 한다. 장내경기가 따로 있는 것을 일반인은 모른다고 여기고 안심한다. 헛가락은 그렇지 않다. 장외에 머무르지 않고, 바라는 것이 더 크다. 몰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와 승부를 조작해 장내경기를 휩쓸려고 한다. 단수가 높은 만큼 위험성이 크다.

헛가락은 서론만이 아니다. 본론까지 갖추어 완성도를 높인 듯한 외형를 갖춘다. 본론의 내용은 허망해 잡아내 다스리려고 하면 함정에 빠진다. 빛 좋은 개살구인 것을 바로 알고, 화려한 꾸밈새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논리를 교묘한 언사로 희롱한다. 이론 창조의 필수 요건인 철학의 뼈대가 없어 흐물흐물한 것을 비상한 재주로 단단하게 보이게 한다. 인기를 누리는 수입품 학문의 다채로운 품목을 현란하게 늘어놓아 외관을 장식하고, 거기 끼일 수 있는 명품의 짝퉁을 눈을 속일 수 있게 만들었다.  

허언은 사실을 확인하면 금방 들통이 나므로, 길게 염려할 것은 없다. 허세는 그대로 두어도 피해가 아주 심각하지는 않다. 학문의 관중을 훈련하는 학사과정 학생까지는 진위를 분간하지 못하고 허세에 흔들리는 것을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염려가 더 확대되지는 않는다. 학문의 선수 또는 생산자를 양성하는 대학원의 학생이나 그 이상의 연구자는, 장외에서 소리치는 허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허세의 저작을 문필이라고 여기고 연구로 인정하지는 않아 혼란이 없다. 

헛가락은 허언이나 허세와 달라 피해가 심각할 수 있다. 현직 교수로 재직하는 사람이 강의에서도 늘 하는 짓이어서, 학사과정 학생들의 혼을 빼고, 대학원을 초토화할 염려가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와 있으면, 피해가 국제적인 사건으로 확대된다. 출판한 책은 폭발물 수준의 위험을 안고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논란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성실한 토론은 기대할 수 없다. 말썽을 일으켜 튀고자 하는 작전에 말려든다.

이런 글이나 쓰면서 그릇된 세태를 개탄하는 것은 적절한 대책이 아니다. 정체를 폭로해 규탄하는 방법은, 짝퉁 제조를 행세 거리로 삼는 헛가락이 워낙 단수가 높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적극적 대책만 해결의 길을 열어준다. 철학의 뼈대를 제대로 갖추고 타당한 논리를 전개하는 헛가락이 아닌 참가락을 들려주어, 학문 내외의 청중이 함께 깨어나게 해야 한다. 

한국의 학문이 수입학에 머무르는 구습을 청산해야 한다, 한국이 새로운 선진국임을 입증하는 창조학을 이룩해야 한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심도 있게 해결하고 세계사의 진로 개척을 선도하는 학문을 힘써 해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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