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성인이 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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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성인이 되는 시대
  • 허원기 건국대·문학사상
  • 승인 2023.03.0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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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새로운 시대는 그 이전 시대를 부정하면서 나타나고, 그 이전 시대는 또 그것의 이전 시대를 새로 부정하면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대는 그 이전의 이전 시대를 다시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는 그 이전의 이전 시대에 대한 이중부정의 시대가 되겠다. 한 시대는 그 시대보다 한 단계 이전 시대를 부정하고, 두 단계 이전 시대를 긍정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의 큰 흐름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그러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도 한 단계 이전의 중세를 부정하고 두 단계 이전인 고대를 긍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직은 오지 않은 근대 이후의 새로운 시대는, 아마도 그 어떤 근대 부정과 그 어떤 중세 긍정의 방식을 통해 전개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근대의 어떤 것을 부정하고 중세의 어떤 것을 긍정하며 새로운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다음 시대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주류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부정하면서, 그 부정의 지침을 중세의 그 무엇으로부터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근대는 우리에게 빛이고 축복이었으나, 이제는 하나의 폭력이고 이데올로기이고 속박이고 어둠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근대가 잃어버린 중세의 미덕을 생각해 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삶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졌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한다고 하는 네 가지 본질, 진선미성(眞善美聖) 중에서 진선미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성스러움은 이제 우리에게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끝내는 모두 내려놓고 가야 할 물질 소유에 대한 지나친 강박 때문에, 중세인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인의 영혼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타락하였다. 바야흐로 극단적인 속물들의 전성시대이다. 

초월적인 정신주의와 도덕주의의 압박으로부터, 물질을 욕망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자아에 새롭게 눈을 뜨고 보편적으로 공감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근대인의 마음속에는 요괴들이 살고 있다. 요괴란 무엇일까? 이야기 속의 요괴들은 초능력을 가졌으나, 그 힘을 도덕적으로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술법에 통달하여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들의 심성은 여전히 짐승의 욕망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도통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자기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는 요괴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 등을 거치면서, 이 시대의 인간은 중세인이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초능력을 도덕적으로 자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에고의 탐욕을 극대화하며 부추기고 있다. 인륜이나 도덕은 알고 싶지 않고, 오직 초능력자가 되려고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가진 한 마리의 요괴가 되라고 가르친다. 에고의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대정신이 되었다. 또한 도덕 윤리나 세계평화, 인류 공영의 대의라고 하는 거대 담론은 다만 속임수이고 허상일 뿐이라고 하며 학문적 허무주의가 널리 유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초능력에 대한 도덕적 통제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인간의 과도한 능력이 사회와 문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그 주체인 개인마저 파괴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안에서 요괴를 본다. 요괴 속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을 본다. 

새로운 시대가 중세에서 어떠한 미덕을 선택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고 흥미롭다. 특히 근대가 잃어버린 중세 시대 삶의 미덕을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유교는 도척이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에서도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중세인들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인격을 성현이라고 불렀다. 중세의 지성인들은 세상을 커다란 수도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하고 숭고한 수도원을 잃어버렸다. 수도승들의 삶은, 한편으로 성현의 말씀을 낭송하고 필사하면서, 또 한편으로 명상하고 수양하는 것이다. 주희는 그러한 삶을, ‘하루의 반은 정좌하고 반은 책을 읽는다[半日靜坐, 半日讀書]’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이상은 보편적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왕수인은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성인[滿街都是聖人]’이라고 하였으나 대중이 성인이 되는 시대는 오지 않았다. 왕을 성인으로 만들려 했던 유교의 프로젝트조차도 실현하기 어려웠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성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옛 성현들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이상은 헛꿈일 뿐인가? 필자는 생각한다. 성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인은 다만 에고의 욕망을 성찰하고 자율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하던 육체적인 노동, 지식정보의 학습, 수리적 논리적 추론을 기계와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시대이다. 대중은 넉넉한 여유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명상하며 성인의 말씀을 낭송하는 삶의 방식이 보편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시대의 대중은 옛날의 왕들에 못지않은 큰 권능을 지니게 되었다. 요괴의 마음을 가진 왕이 있으면 백성의 삶이 비참하고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요괴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대중도 사회와 문명과 자연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이 성현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인류 문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다. 대중이 모두 고전어로 성인의 말씀을 낭송하며, 저마다 심신을 수양하여, 대중이 모두 성인이 되는 시대가 과연 도래할 수 있을지, 흥미롭게 지켜보고자 한다. 

 

허원기 건국대·문학사상

건국대학교 동화ㆍ한국어문화학과 교수. 삼국유사의 구도(求道) 이야기를 연구하여 석사논문을 썼고, 판소리 서사의 신명풀이를 연구하여 박사논문을 썼다. 우리 이야기의 사상과 미학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글쓰기의 사상사로 연구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야기의 사상사와 글쓰기의 사상사를 정리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판소리의 신명풀이 미학』, 『고전 서사문학의 사상과 미학』, 『고전 서사문학의 계보』, 『필사본 고전소설 읽는 법』, 『고전문학과 인성론』, 『우리 고전의 서사 문법』, 『충주, 옛 문학과 민속의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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