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①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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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①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03.0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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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평론]

■ 동아시아 시각에서 일본의 정신세계 파헤치기 ① - 습합과 작위로 빚어낸 기묘한 사상사

 

 

동아시아의 우열반 의식 해체하기

이 글은 동아시아 사상-문화의 상호관계성 담론에 일반화된 관습을 해체하려고 한다. 즉, 서구의 자극에 대해 동아시아가 반응하여 근대화하고 있다는 서구 주도의 근대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원류이며 한반도가 이를 받아들여 일본에 전해주었고, 서세동점의 시대에는 서구적 근대화를 일본이 앞서 수용하여 한국과 중국을 앞질러 아시아의 모범국이 되었다는 사고의 습관이다. 이러한 기존의 우열관계성 담론으로 동아시아를 분석하는 태도는 고전시대에는 중화주의적 문명관이, 탈고전시대에는 서구 중심적 근대화론이 여전히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를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문명과 근대화의 우열관계는 역사의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는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하며, 또한 당시에 상호격차가 두드러진 어느 제한적 측면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동서양 ‘상호학습효과’에 의한 ‘상호연동과 혼성근대화론’(필자)의 시각에서 이 주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송대 이래 중국과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문화, 정치제도, 경제적 측면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으나 청대 중기부터 유럽에 점차 뒤처지게 된다. 근현대 들어서 중국이 혁명을 통하여 서구를 극복하고 다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였으나, 시민사회의 문화와 생활세계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한국과 일본에 비해 뒤처지고 있다. 고전시대 한국이 유교와 불교 등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해서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일본이 서구적 근대화를 중국과 한국보다 빨리 모방하여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대 초기에 한정해서 경제-군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사상과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후진적인 ‘주술적인 신도-불교 습합문화’와 ‘천황이념’보다 선진적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문화의 다양성과 시민-지식인의 사회참여의식, 정치제도 측면에서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앞서 나가는 중이다. 

주목할 것은 장기 역사의 관점에서 최근의 동서양 관계성은 아편전쟁(1840) 이후 트럼프 시대(2021)까지는 영-미패권의 우세국면이었으나, 이후부터 중-미 양대 패권의 병립기를 거쳐 22세기에 이르면 중국과 동아시아가 서양을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이른바, 동서양과 동아시아 유교국가 간의 우열담론(서구중심주의, 중화주의, 일본의 서구화 우등생론)을 바탕으로 하는 연구들은 역사상 특정 시기 특정 측면만을 두드러지게 평가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장기역사적으로 보면 동서양과 동아시아 한중일 간의 우열관계는 항상 유동하고 있다. 오늘날은 탈근대적 문제의식에서 발원한 탈동서이원론적 사고에 힘입어 근대성의 다양한 특성을 논하면서 그 역사적 개연성을 탐구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한중일 사상사를 관조해보면 무시할 수 없는 특징을 하나 더 발견한다. 동아 3국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즐겁기보다 불쾌한 역사적 기억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고, 현재를 포함하여 앞으로도 그 기억을 매개로 상호관계성을 교환할 가능성이 크다. 즉, 과거가 현재의 복선으로,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구성하는 참고자원으로 작용한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상사를 장기에 걸쳐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일들이 서로의 복선으로 작용하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시점에서 한중일 상호관계성의 근거를 과거의 사상사적 조건에 연결하여 규정지을 수 있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도 3국의 사상-문화 네트워크의 현재와 미래가 그냥 과거와 연관이 없이 우연히 전개한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에서 현미경적 연구를 통해 미시적 문제들을 분석할 때보다 망원경으로 문제들의 거시적 인과관계를 바라보면 연동하는 측면을 관찰할 수 있다. 미시적 문제들은 서로 관계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경우가 있지만, 거시적으로 바라볼수록 우연성보다는 연동하여 일어나는 개연성이 더 크다. 즉, 지구의 움직임은 온 우주 체계의 움직임과 연관이 깊다는 사유이다. 

이 글은 기존의 한중일 근대화의 우열관계성 의식을 해체하고 역사의 확대경을 사용하여 외재적 비판론으로써 일본 정신세계의 구조를 해부하고자 한다. 같은 시각으로 한국론과 중국론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4000개의 도리이가 유명한 일본 교토의 후시미이나리 신사

지진으로 탄생한 신도-불교 습합사상과 문화

인류문명의 초기에는 과학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자연재해는 신비한 힘을 경외하는 정서를 확산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연현상이 아닌 ‘신의 분노’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언가 모를 신비한 존재에 제사 지내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야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문명 초기에는 자연숭배와 주술적 제의가 지배하던 ‘정서와 신화의 시대’였다. 이후 점차 합리적 ‘이성과 역사의 시대’로 발전하는 게 역사 흐름의 순리였다. 동아시아에 보편화한 유교사상은 바로 이러한 역사시대로의 전환을 인도한 사상이었으나 중국-한국과 달리 일본은 유교를 간헐적이고 기능적으로만 수용하였다. 

이 글에서 ‘동아시아에 보편화한 유교사상’(‘유교보편’이라 약칭)의 함의는 ‘유교사상이 내면화하여 형성된 가치판단의 준거와 사고체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사상사적 시각에서 보면, 동아시아의 윤리, 지배기제(통치이념과 제도), 문화는 유교에서 발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아시아를 ‘유교보편 관계망의 세계’로 칭할 수 있다. 

추론하면, 일본의 정신세계는 자연재해, 그중에서 지진의 산고를 거치면서 출발하였다. 지진과 귀신 등 불가지의 것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자연숭배와 더불어 토속 신에게 보호를 바라는 신앙이 생기면서 초기 신도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중국-한국에서 불교가 전래하여 자극받은 토속신앙이 신도로 더욱 구체화하면서 발전하였다. 마치 불교의 자극으로 도교의 발전이 구체화한 중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일본 사상사의 중요한 특성은 외래사상을 자신의 토착사상과 결합시키는 습합(Syncretism) 현상이다(이광래). 이른바, 종교나 사상이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외래의 것과 혼합을 이룬다는 함의이다. 이것은 ‘좋은 것은 취한다’라는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 형성과 변동의 ‘방법론’으로 칭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변동 방법론에 의해 신도가 불교와 습합하여 생성된 ‘신불교’는 일본의 고유한 신앙이자 사상이며 점차 전통문화로 내면화하였다. 고전시대 일본의 사상사는 신도와 다른 사상(불교, 도교, 유교, 대화혼)과의 습합의 역사이며, 사상이 정치를 통해 구현되듯이 정치는 주로 신불교와 함께 전개되었다. 

이렇게 신도가 불교와 습합하여 생성된 신불교는 일본 사상사의 몇 가지 특성을 구성한다.

첫째, 토속신앙에서 유래한 신도는 신비주의-주술적 특성이 강하여 기독교, 그리스 사상, 유교와 같은 세계적 보편종교나 사상과는 달리 공인된 경전(논어, 불경, 성서)과 성인-신(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이 없으므로 각종 신화와 전설에서 유래한 토속신앙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수많은 종단과 신이 구성되어 출현한다. 신도는 내세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종교와는 달리 현세적이다. 따라서 성인-신이 제시한 인류 보편윤리, 권선징악의 교훈, 행복한 삶과 사후의 구원을 지향하는 희망적인 가르침이 애매모호하다. 따라서 생시의 선행과 악행을 불문하고 죽으면 모두 신이 되며, 신들은 지위 고하가 없이 평등하다 믿는다.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된 신들은 전범자도 있고 전쟁 피해자들도 있어서 신도의 기묘하고 비상식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와 예수를 한 교회에서 다 같이 숭배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도는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기보다는 정서적 믿음에 근거한 신비주의적 의사종교이자 범신론적 애니미즘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서의 두려움으로 혼란해진 심리상태는 신적인 존재에 위탁하여 해소하는 게 가장 손쉬운 힐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신도가 인류사회에 보편가치를 제시하는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면 차라리 일본의 전통문화로 여기는 게 적실하다. 21세기에도 일본문화에는 신도의 흔적이 진하게 스며있어서 약 800만의 신과 8만 개의 신사가 있다. 저 유명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신들의 온천에서 부산스럽게 일하는 수많은 요괴가 나오는데, 이들이 모두 신이다. 

둘째, 신도와 불교는 각자의 본질적 성격은 다르지만, 정치와 사회적으로는 타협하여 점차 신불교사상이 형성되고 유력한 지배기제로 활용되는 정치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일본의 문화로서 내면화한다.

신불교는 일본에서 천황이념과 호족세력의 지배이념에 의해서 국가신도, 국가불교로 발전하는데, 이는 양자가 정치화 요인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세 신도는 대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신국의식을 고취하였고, 요시다 신도는 유교의 성인, 부처와는 다른 우주 최고의 신의 본질을 밝히려는 종지를 표명한다. 이러한 종지들은 불교와 습합을 이루면서 지배계급의 정치이념과도 연동할 수 있는 개연성을 보여준다. 중-한에서 전래한 보편종교인 불교는 포교를 위해서 지배계층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그 자체가 토속신앙을 포용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자연히 지배계급은 신불교를 활용하여 민중의 충성을 확보하고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고전시대에는 일본만이 아니라 남북조-당대 중국에서 유불도가 공존하였고, 한반도 통일신라-고려시대는 유교보다는 불교가 정치적 통합에 더 유력하게 활용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신불교는 천황(7세기에 천황 호칭 법제화, 덴무천황이 탄생)과 세습호족이 민중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지배기제로 활용되어 정치화의 길을 걷는다. 천황과 호족 지배계층이 신불사상과 서로 호혜적 관계를 맺는 이유는 백성이 충성심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정신적 매개로 신비주의적 신앙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미카제 특공대가 공중에서 미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초월적 존재인 천황에 대한 만세를 외치면서 성의를 표하면서 위로를 얻고, 죽으면 신이 되어 신사에 봉안된다는 환각적 심리상태는 주술적 신앙이 아니면 이해가 힘들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불교는 일본 사회에서도 긍정적으로 수용되었으며 황실에서도 신도와 불교의 제사를 함께 거행하였다. 신도는 천황과 그 조상들을 신으로 존숭하였으며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나라 시대(710~784년) 이후 오랫동안 신도와 불교는 습합하여 발전했다. 7세기 후반 덴무천황의 국가적 통합에는 천황가의 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정점으로 하여, 조정의 신들이 민족신으로 추대되었다. 불교 진영도 그 신들을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의 예로써 경의를 표하면서 신도를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본지수적(本地垂迹)설’은 불교가 융성하던 시대에 발생한 신불습합 사상으로서, 신도의 다양한 신들이 다양한 부처들의 화신으로 나타난 일본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반본지수적설’도 등장하는데, 여몽연합군의 침략 이후에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신의 나라’라고 하는 신국사상에서 점차 발전한 사상이다. 신도에서 불교를 분리하자는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만큼 신도는 일본 국체의 핵심 존재이다. 

나라 시대부터는 신사 내에 사찰이 지어지면서 신불의 공존은 일본의 보편적 문화가 되었다. 이후 지나치게 정치세력화한 신불교는 오다 노부나가의 참혹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나, 에도 막부의 개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불정치’(야마오카 소오하치)로 영속하였다. 에도 막부 시대는 중국풍 문화가 유행하기도 했으나, 주자학은 통치의 단편적인 기능으로서만 수용되었다. 따라서 유교가 일본 사상사의 주체로서 내면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의 신불분리령과 신도국교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모든 신사와 사찰은 분리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서세동점의 시대에 일본의 상황은 서구적 자유화 사조에 대항하면서 ‘국체로서의 천황’을 존숭하는 게 시급했다.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유일한 숭배 대상인 부처가 존재하고, 또한 개인적 해탈을 중시하는 보편종교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국가적 통합의 사상으로서는 불리했다. 반면에, 공동체의 화합을 강조하는 신도는 하나의 경전과 유일한 숭배 대상이 없어서 천황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하는 국교로 삼아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데 유리했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국가이념 개혁은 천황이 신도의 중심이 되어 국가적 통합의 상징이 되고, 새로 등장한 무가호족세력의 계승자(하급 사무라이계급 출신으로 이후 보수우익세력화 함)들이 보좌하면서 군국주의와 침략주의를 추진하게 된 배경과 연관이 깊다. 

상기처럼 중-한에서 건너간 불교는 신도와 습합하면서 그 보편성이 엷어지며 신도의 특성을 많이 가미하게 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불교가 중-한에서와는 달리 민간과 더욱 친화적인 형태로 발전했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시각에서 보면, 일본 불교는 원래의 보편성(탈주술성, 개인의 해탈)을 적지 않게 소거하여 신도화(현세구복과 공동체화합을 지향)하고 사찰은 가족기업화(패밀리-비즈니스) 한 측면이 크다. 따라서 일본은 토착문화와 외래의 것을 습합하여 일본화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일본의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가치를 ‘재창출’하는 데는 거의 무력함을 볼 수 있다. 후술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사상과 가치 부재의 일본 정신세계의 성향은 서세동점 시대에 동아시아에 큰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즉, 일본은 세계적 보편의 근대성과 동아시아의 유교보편을 토착사상과 습합하여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그 속에 스스로 갇혀 사는 데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충족성의 세계인식’으로 인해 신도-천황이념의 신비주의 커튼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청-조선이 초기에는 주자학으로 국가통합을 이루어 발전하다가, 후기에 들어 교조화하면서 멸망했다. 같은 맥락에서 서세동점 시대 메이지 정부는 신도-천황이념으로 국가적 통합과 침략주의를 잠시 성공적으로 추구하였으나, 패전 이후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신뢰를 상실하고 쇠퇴하는 것은 신도-천황이념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보수우익의 ‘자기 충족성’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일본 정신세계의 특징을 동아시아의 보편가치를 제시한 유교적 합리주의 시각에서 보면, 신불교사상은 종교나 사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통문화’로 여기는 게 적절하다. 또한 일본 역사를 통틀어 신도와 불교는 지배층과 호응관계를 맺으면서 지배기제와 정치문화로서 내면화하는데, 유교보다 영향력이 더 컸다. 양자 습합의 사조를 문화의 구성적 시각에서 보는 이유는 한국에서도 무속신앙을 종교가 아닌 조상의 ‘무형문화재’의 하나로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 보존하려는 태도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한-중국에서는 신도와 같은 신비주의적 토속신앙과 살아 있는 천황신을 숭배하면서 정치적 지배기제나 민간사회의 보편적 문화로 내면화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유교 사원

유교의 기능화와 보편사상의 부재

고전시대 동아시아에서 ‘유교화-정치발전’은 ‘주술-신화시대’에서 ‘이성-역사시대’로의 순리적인 발전 경로인데, 일본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상술한 대로, 일본은 신불교 사상-문화가 더욱 뿌리를 내리다 보니 유교적 정치발전이 거의 산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송대 주자학이 도교와 불교를 종교영역으로 밀어제치고 유교국가의 문을 열었고, 고려가 주자학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국가불교를 극복하는 발전 경로와는 달랐다. 중화문명 중심과의 지정학적 격리성과 조공-책봉 체제에서 탈중국화, 지진의 빈발과 토속신앙의 번성이 그 배경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유교화-정치발전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데, 다음 몇 가지를 예시할 수 있다. 세습호족의 봉건적 지배체제에서 군주 중앙집권의 군현제, 군주의 자의적 지배에서 율령제, 탈세습-능력주의 과거제를 통한 관료제, 체제교학(관학)으로서의 유교와 학교제도, 간언의 법제화이다. 이러한 발전상은 고전시대 동아시아 유교국가가 서양보다 선진적인 문명을 성취했다는 지표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교는 관학으로는 거의 채택되지 못하였고, 주로 지식계의 교양과 학문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유교가 일본사회의 유력한 윤리체계를 구성한 게 아니라, 신불교가 무사도와 습합하여 독특한 일본식 윤리와 문화를 구성하였다. 이른바, 중국-한국에서의 삼강오륜, 주자학의 인성론과 주자가례가 규정하는 유교적 윤리체계는 일본에서 신불교, 무사도와 습합하면서 보편화한다.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은 일본의 독특한 정서-문화에 대한 좋은 토론 자료이다. 

일본에서는 신불습합 통치이념이 유교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고, 제도적으로는 천황과 호족세력이 상호경쟁하는 구도에서 후자가 천황을 상징으로 밀어내고 현실정치를 주도하였다. 소위 무가호족세력은 헤이케 정권(1160년대)에 등장해서 가마쿠라 막부(1192년)에서 유력하게 자리 잡았다. 공교롭게 고려의 무신정권(1170년)도 비슷한 시기이다. 일본식 호족연합체제의 봉건제를 중세 유럽과 비슷하다 하여 일본의 선진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동아시아 학계에서 코미디로 취급받는다.

일본의 신불교 사상에서 추론하면, 고전시대 중국-한국의 유교적 군주와는 달리 신적인 존재인 천황과 세습호족의 지배체제에서는 유교의 강상윤리보다 신불교의 신앙적 정서에서 우러나는 충성심과 더 좋은 호응관계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군주 중앙집권의 군현제에서 가능한 과거제-관료제가 부재한 일본의 세습호족 정권인 봉건제에서는 한-중국과는 달리 유교의 위상을 지배기제의 부분적 기능에만 머물게 하였다. 쇼토쿠(574~622) 태자의 개혁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유불도 습합을 통한 최초의 ‘17조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어서 다이카개신(646년)으로 잠시 유교적 개혁(천황 지배, 율령제)이 이루어지지만, 당조 말기에 견당사 파견을 중지하고 유교화-정치발전을 거부하면서 다시 일본적인 신불교의 지배기제로 돌아가게 된다. 

지배기제의 기능에 머물렀지만, 주자학이 처음 전래한 것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로, 불승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주자학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승려 슌조(俊芿)는 1199년 송나라에 들어가 불학과 주자학을 함께 배우고, 1211년 귀국하면서 많은 유교 서적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불승이 전래한 것에서 보듯이 당시의 주자학은 줄곧 불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즉, 지식인의 개인적 차원의 교양과 학문적 추구에 그쳤다.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강항과 접촉하면서 퇴계의 주자학을 익히고, 에도 막부의 개창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청을 받아 주자학을 강의하였다. 이어서 하야시 라잔(1583~1657), 이토 진사이(1627~1705) 등이 일본 주자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들이다. 막부 초기에는 퇴계학의 전래와 중앙집권의 필요성으로 주자학이 권장되었다. 그러나 천황과 현실권력(세습호족연합지배)의 분리구조를 극복할 수 없어서 주자학의 관학화는 한계에 부딪히고 기능적 수용에 머무르게 되었다. 즉, 일본의 다양한 사상 - 신불교, 병학과 무사도, 유교 -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후지와라는 승려 출신으로 일본 최초의 주자학자이자 유승(儒僧)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에서도 일본 사상사에서 신불교와 유교의 선후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규우 소라이

18세기 중기에 이르러 막부는 교호개혁(享保の改革)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 이념적인 뒷받침을 제공한 학자가 오규우 소라이(1666~1728)다.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에 의하면 소라이학은 주자학적 사유체계를 극복하고 일본의 근대적 사상체계로 이끌었다. 이른바, ‘도(道)는 초월적 자연이 부여한 게 아니라, 성인(聖人)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를 따르면, 성인인 통치자(쇼군)는 하늘이 부여한 ‘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작위로 만든 통치의 ‘도’를 수행할 수 있다. 이로써 정치에서 도덕을 배제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의 근대적 지평을 사전에 개척하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마루야마의 해석을 동아시아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마루야마는 일본 근대성의 맹아를 소라이의 ‘반주자학적 주체적 작위론’에서 찾지만, 이미 순자 유교사상은 하늘(天)과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소라이학 사유의 근거를 앞서 제시하였다. 소라이는 주자학의 인격수양주의보다 순자학의 유교현실주의 정치사상에 가깝다. 주자는 순자유교의 현실주의를 비판하고 유교 이단으로 규정하여 도통론에서도 제외하였다. 마루야마는 소라이학의 반주자학적 독창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순자유교의 영향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사유의 출발을 고려하면 순자유교의 패러다임 안에 속하고 있다(필자, 쓰다 소키치). 소라이학은 순자유교의 보편성에 일본의 특수성을 적용하여 재구성해낸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라이와 거의 동시대에 청조 학계에서는 순자유교의 가치를 재발굴하여 복권시킨다.

이 글은 마루야마의 ‘소라이학이 일본 근대성의 초석을 제공하였다는 해석’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면서, 일본의 정신세계에서 ‘주체적인 작위’는 사상이기보다 신사상을 공리적으로 제조하려는 일종의 ‘방법론’으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마루야마가 높이 평가한 것은 소라이학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방법론’인 것이다. 

소라이학은 주자학에서 하늘이 명한 ‘보편의 도(리)’보다는 통치자에게 ‘도’의 결정권을 승인하는 현실주의적 순자유교의 일본식 버전이다. 즉, 소라이학이 주자학적 사유를 해체한 동기는 막부체제의 최고 통치자에게 하늘이 부여한 도덕이라는 굴레를 벗겨내어 현실주의적인 지배기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를 정초하기 위함이다. ‘쥬신구라’(忠臣藏) 사건에 대해서도 소라이는 막부의 권위에 최종결정권을 부여하였다. 

이른바, 마루야마의 해석과는 달리, 일본이 서구로부터 받은 외래적 충격의 상황에서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인 청-조선보다 융통성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던 근거는 소라이학의 내용이 아니라, 소라이가 활용했던 ‘주체적 작위의 방법론’이다. 중국과 조선처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유교보편이 부재한 일본은 통치자의 작위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신불교 문화적인 도’(필자)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고, 메이지 유신과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즉, 일본은 보편사상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체적 작위의 방법론’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소라이 이후에 일본은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의 ‘국학’과 스기타 겐파쿠(1733~1817)의 ‘란학’이 출현하였다. 어쩌면 대조적인 세계관을 표방하는 두 사조가 일본 사상사에서 중대한 위치를 점하게 된 이유는 ‘이이토코토리’ 문화의 반영일 것이다. 외래사상도 필요하면 주체적 작위의 방법론을 통하여 변용하고 습합하여 활용한다는 정신문화는 메이지 시대와 오늘날에도 영속한다. 문제는 이러한 작위적 방법론으로 일본식 보편사상을 창조하려는 공리주의적 태도는 메이지 시대에 서구제국주의마저도 기꺼이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한국과 유비하면, 일본의 사상사적 독특성은 동아시아의 유교보편을 가치체계로 수용하지 않고, 신불교와 유교, 병학-무사도를 모두 습합하여 형성된 사상-문화가 일반화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을 달리 보면, 외래사상의 원리를 순수하게 추구하기보다도 공리주의적으로 그것을 토착 종교나 사상과 습합하여 사용하려는 태도가 주목할 특징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리주의적 습합의 사상사에서는 ‘보편사상의 부재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항상 보편을 작위적으로 구성하려는 긴장’에 싸여 지내게 된다. 메이지 시대의 작위적 보편사상의 추구와 작위적 동아시아사상은 이러한 일본 사상사의 작위적 전개를 대변하고 있다.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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