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근대의 시작 - 김미지, 『한국 근대문학, 횡단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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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근대의 시작 - 김미지, 『한국 근대문학, 횡단의 상상』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 승인 2023.03.0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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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의 역할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성공 요인으로 꼽힐 만큼 컸다.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문학이 싹튼 것도, 지인식들이 학문적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던 것도 번역의 영향력 속에서였다. 말하자면 번역서는 서구학문을 수용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특히 말과 글을 빼앗긴 조선에서 일본어 번역의 영향력은 컸다. 

장 자크 루소 수용사 연구에 따르면 1909년 『황성신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번역본을 『로사민약盧梭民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바 있다. 다만 당시 영향력이 컸던 신문이 루소 작품의 역자가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그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일본의 학자이자 번역가 나카에 초민의 번역이었다. 1929년 인구 30만의 경성에서 배재고보를 다닌 동국대 철학과 정종 교수(1915∼2016)의 자서전에는 ‘대삼영이 번역한 루소의 『참회록』을 비롯해 『누벨 엘로이즈』와 『에밀』을 경성의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삼영(大杉栄)은 일본의 번역가이자 세계적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이다. 루소의 우리말 번역이 해방 이후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다가 21세기 들어서야 그의 전집이 출간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근대 일본의 루소 수용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근대문학의 출발점에도 일본의 번역을 통해 들어온 세계문학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의 문학을 조선어로 직접 번역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 소설가 박태원이 모두 영문학도였고 실제 번역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들의 창작과정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서구 문학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김미지 교수의 『한국 근대문학, 횡단의 상상』(소명출판)은 특히 박태원의 외국문학 번역 작업이 그의 작품세계에 준 영향은 물론 영어 혹은 일본어를 조선어로 번역하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 나 역시 프랑스어 번역자로서 박태원이 영어와 일본어, 이중어 사전을 두고 최종 목적지인 조선어로 가기 위해 겪었을 식민지 지식인의 고민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연구자는 저서에서 “일본어라는 조건 속에서 동시대 세계와 직접 접촉을 꿈꾸고 중역이 아닌 의역을 통해 조선어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으로 박태원의 작업을 평가한다. 

외국작가의 원문을 일본어 중역이 아닌 원문으로 직접 번역하고자 했던 박태원 번역의 결과물은 헤밍웨이의 「도살자 The Killers」와 리엄 오플래허티의 「봄의 파종 Spring Sowing」, 맨스필드의 「차 한잔 A Cup of Tea」 등이다. 헤밍웨이 작품의 경우 1927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이 식민지 조선에서 1931년에 박태원의 번역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니 당대 지식인의 지적 욕구나 근대문학 작가들의 서구문학에 대한 열정을 엿보게 한다. 연구자는 박태원 번역의 특징을 원문에 충실한 대신 ‘도착어로의 완전한 귀화’, 즉 가독성 혹은 문장의 ‘유려함’을 선택한 데 두고 있다. 다만 박태원의 번역 작업은 그 자체로서 목적을 지닌다기보다는 외국 문학에 대한 이해와 창작을 위한 디딤돌로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근대문학, 횡단의 상상』에는 박태원에 대한 논의 말고도 번역 작업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중·일 세 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역사, 문화, 사상적 흐름을 일별하고자 하는 시도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 일본에서는 1904년부터 1917년까지 번역되었고, 중국에서는 1922년 일본 유학생 궈모뤄가, 한국에서는 1923년 김영보가 『웰텔의 비탄』이라는 제목으로 발췌 번역하였다. 연구자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인 중국의 궈모뤄는 “마르크스주의 안에 괴테를 포섭하는 방식으로” 그를 ‘전유’했고, 일본의 문예 비평가 가메이 가쓰이치로는 “괴테라는 인간의 삶의 여정이 보여주는 영혼의 모험”을 배우고자 했으며, 소설가 한설야는 베르테르와 롯테에 비견되는 인물들을 통해 “베르테르의 정열과 순수, 인간 의지의 고양이라는 과제를 상기시켰다.” ‘야만의 시대’에 괴테의 작품을 세계문학으로만 읽을 수 없었던 현실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20세기 초 식민지 경성이라는 근대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초창기 번역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과 지식인들의 지적 욕구에 감탄하면서도 순수하게 번역가의 시각으로만 보면 우리말 번역의 지속적 발전의 한계와 단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조선어 대신 일본어를 전면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지식인들조차 일본어 번역본에 익숙해진 현실에서 조선어 번역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원문의 직역으로 세계문학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우리 독서계가 특히 일본어 중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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