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끼가 흐르는 마을'…안동 예끼마을 선성수상길
상태바
'예술의 끼가 흐르는 마을'…안동 예끼마을 선성수상길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4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경북 안동 예끼마을 선성수상길

 

      선성수상길. 도산면 서부리에서 동부리까지 안동호반에 놓인 약 1km 길이의 부교. 선성현길의 백미다. 

호숫가 구릉진 땅에 마을이 있다. 집들은 호수를 바라보며 차곡차곡 앉았다. 저 물밑에 마을 사람들의 고향집이 있고, 공부하던 학교가 있고, 뛰어놀던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을 타고 미끄러지면 왈칵 하고 옛 마을의 노송을 껴안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골목길을 올라오신다. 그녀가 스치는 담벼락에는 꽃이 피어있고, 황금빛 들판이 펼쳐져 있고,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말간 얼굴의 소녀가 어린 동생을 업고 있다. 할머니의 둥근 등위로 물에 잠긴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하다. 이곳은 안동의 도산면 서부리, 오늘날 사람들은 ‘예(藝)끼마을’이라 부른다.    

 

      수몰된 예안사람들이 새로이 터를 잡은 서부리 예끼마을. 집들은 호수를 바라보며 차곡차곡 앉았다. 

도산면 서부리는 조선시대에 예안군 읍내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예안(禮安)에 대해 ‘택리지’에는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의 신령이 서린 복된 땅’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곳은 안동의 북동쪽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기름진 분지였다. 예안의 중심이 서부리였다. 뒤로는 선성산(宣城山)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다 1973년 안동댐을 만들면서 마을 일부가 물에 잠겼고 1974년에는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대부분의 예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옛 마을의 산언덕에 새로운 터를 다졌다. 처음 마을 규모는 400여 가구에 달했다. 대구를 오가는 직행 시외버스도 있었다. 그러던 마을은 점차 조용해졌다. 
 

                   선성산. 예안의 진산으로 후삼국시대의 산성이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산성공원이다.

2011년 국책사업인 3대 문화권사업이 이웃 동부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서부리에도 ‘선성현 문화단지 조성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때부터 마을의 옛 이야기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역사와 예술로 마을을 살려보자’는 데에 주민들의 의지와 기관의 뜻이 모아졌다. 그렇게 2014년 ‘도산 서부리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다. 2018년 사업이 마무리 될 즈음 마을에는 ‘예끼’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예술의 끼’라는 의미다. 우체국은 전시공간과 도자공방으로 변했다. 옛 마을회관에는 작가가 상주하며 작업을 한다. 빈집들은 크고 작은 갤러리와 공방, 식당, 카페 등이 되었고 골목길은 트릭아트와 벽화로 채워졌다.   

 

                                       도산면 서부리의 새로운 이름, 예끼. ‘예술의 끼’라는 의미다.   

‘예안교회’, ‘예안이발관’, ‘농협 예안지점’ 등 예안이라는 명칭을 단 간판이 종종 보인다. 이제 도산면이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예안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그에 못지않게 자주 보이는 이름이 ‘선성(宣城)’이다. 선성은 예안의 옛 이름으로 고려 태조 왕건 때의 명칭이다. 마을 중턱에 있는 한옥의 솟을대문에 ‘선성현아문(宣城縣衙門)’ 현판이 걸려 있다. 선성현 관아의 대문이라는 뜻이다. 대문 안의 두 건물은 옛날 예안면사무소와 부속 건물을 옮겨온 것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장부당(掌簿堂)은 한옥카페, 오른쪽의 근민당(近民堂)은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마당 한쪽의 철탑은 의용소방대 망대로 사용하던 것이란다. 
 
마을 오른편 안동호가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선성현 문화단지’와 숙박시설인 한옥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 객사, 동헌, 관청 등 옛 관아가 복원되어 있고 선성현에 대한 전반을 알 수 있는 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객사의 한쪽 귀퉁이에는 쌍벽루(雙碧樓)라는 누각이 있다. 선성읍지에 ‘부진(浮津) 언덕 위에 있다’고 나오는데 현재의 자리가 제법 그럴듯하다. 도각도각 루에 오르는 걸음소리 들린다. 난간 위로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조용한 시선이 호수에 머물러 있다.  

 

    선성수상길. 도산면 서부리에서 동부리까지 안동호반에 놓인 약 1km 길이의 부교. 선성현길의 백미다. 

호수의 수면 위에 길이 있다. 옛 마을의 하늘을 즈려밟고 가는 선성 수상길. 이 길은 내내 잠기지 말라고 부교(浮橋)로 놓였다. 폭은 2.7m. 비교적 넉넉한 너비여서인지 봄 물결이 잔잔해서인지 걸음에 안정감이 있다. 고요하다. 물새는 호수로 몸을 휘감고 긴 목을 곧추세워 여왕처럼 고개를 까닥인다. 꿀렁꿀렁 물결이 길을 어르는 소리가 꿈결 같다. 물속을 들여다본다. 초가지붕과 사립문은 사라졌을지라도 어느 집 주춧돌은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다만 윤슬에 눈이 부실 뿐. 길의 가운데에 풍금과 책걸상이 놓여 있다. 이곳에 옛 예안국민학교가 있었고 더 이전에는 예안 객사가 있었다. 학교는 1909년 4월, 이인화(李仁和)라는 분이 후진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재를 들여 사립선명학교로 설립했다고 한다. 1912년 4월 공립으로 개편해 예안공립보통학교로 개칭했고 1941년 예안공립초등학교, 광복 후 예안국민학교로 다시 개칭했다. 학교는 1974년 안동댐 건설 때 현재의 한국국학진흥원 옆에 자리 잡았지만 학생이 없어 폐교됐다.

 

                                 선성수상길 가운데에 있는 수몰된 예안국민학교의 기념 조형물.

풍금 앞에서 뒤돌아보면 나지막하지만 가파른 산이 길게 엎드려 있다. 예안의 진산이었던 선성산이다. 동헌 뒤쪽에 있는 산으로 북산성이라고도 불렀는데 돌로 쌓은 성과 군창이 있었다고 한다. 산성은 터만 남아 오랫동안 산성공원으로 불러왔다. 그러다 안동유교문화권 개발이 한창일 때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2015년에 비로소 조사가 시작됐다. 산성은 후삼국 시대의 것으로 북쪽이 트이고 세 방향이 험준한 벼랑과 체성으로 둘러싸인 남고북저 소쿠리의 모양이다. 산성공원 입구에서 바라보면 기울어진 소쿠리 형상이 확연하다. 마루금을 따라 띄엄띄엄 놓인 그네 벤치가 나뭇잎마냥 살랑살랑 흔들린다. 수상길이 선성산을 휘돌면 물에 젖은 산과 산 사이로 멀리 기와지붕들의 작은 무리가 보인다. 예안향교다. 지금도 2월과 8월에 제향하고 있다고 한다. 

 

선성수상길 끝에 동부리의 안동호반 자연휴양림이 있다. 선성현길은 우측 산사면을 따라 월천서당으로 이어진다.  

선성 수상길이 다시 뭍으로 올라서는 곳에는 동부리의 안동호반 자연휴양림이 있다. 여기서 길은 동부리의 산사면을 따라 다시 멀리로 이어진다. 이 길은 2017년에 만들어진 ‘안동선비순례길’의 1코스인 ‘선성현길’에 속해 있다. 오천리 군자마을에서 시작해 서부리 선성현문화단지와 수상길을 거쳐 동부리 월천서당에 이르는 길이다. ‘안동선비순례길’은 퇴계의 귀향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퇴계선생은 1569년 음력 3월, 선조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고하고 서울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안동의 ‘도산서당’까지 320km를 12일간 걸어서 귀향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 9개의 코스가 91.3km로 이어져 있다. 이어지는 산길을 조금 전진하다 돌아선다. 꿀렁꿀렁, 꿈결 같던 그 물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