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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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3.04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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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9강_ 원용진 서강대 교수의 「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기획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자유 개념과 자유주의가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진화해왔는지 검토해보는 다섯 번째 섹션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제39강 원용진 교수(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원용진 교수는 “긴 세월 동안 우리 곁을 지나간 많은 대중문화물이나 사건을 등장시켜 그 변화되어온 자유와 개인의 논의를 정리하려 한다”고 밝히면서 “자유, 개인에 대한 논의 폭을 넓히고, 구체적 현실과도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되 대중적인 용어와 사례로 설명”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말하여 “한국의 주요 대중문화물 혹은 대중문화 사건이 개인과 자유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피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방법론으로는 “개인, 자유, 자유주의와 함께 엮이는 개념인 정치, 경제 영역 및 일상 영역에서 평등, 자유, 정의, 입헌, 이성 등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국면을 설정”해 살피고자 하며, 이는 “대중문화를 분석하되 통사적, 국면적, 계보학적으로 개인, 자유, 자유주의가 —다른 개념과 함께— 다뤄진 방식을 분석”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자유를 막는 권력과 자유로운 개인 간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국면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벌어진 동학”을 면밀히 들여다볼 것임을 강조한다. 그 국면별 분석은 목차를 따라 “연애의 시대(번안 소설 『장한몽』과 이광수의 『무정』)”, “만주와 미국의 경험”, “반공으로 자유를 치다”, “도시 주체와 망향 주체”, “텔레비전 위의 젊음과 자유”, “1980년대(저항의 시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그리고 확장하는 시야”, “한류(코리아부 이야기), OTT시대, 아포칼립스 드라마”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지난 2월 11일, 원용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대중문화와 자유로운 개인

자유로운 개인을 좀 더 대중적으로 풀어 말해줄 수 없을까. 개인과 자유,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론 일변도이거나 형이상학적 논의 수준에 머무는 것을 뛰어넘어 좀 더 편한 대중적 용어, 대중적인 사례로 접근해보는 노력이 소중하다. 대중문화와 자유로운 개인을 만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개인, 자유, 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에 맞추어 그 지위, 의미를 수정해왔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성물이다. 긴 세월 동안 우리 곁을 지나간 많은 대중문화물이나 사건을 등장시켜 그 변화되어온 자유와 개인의 논의를 정리하려 한다. 이 연구는 한국의 주요 대중문화물 혹은 대중문화 사건이 개인과 자유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피는 데 그 목적을 둔다.


2. 개인과 자유를 대중문화와 함께 논의하는 방식

개인과 자유, 자유주의를 어떻게 논의해야 할까. 개인, 자유, 자유주의와 함께 엮이는 개념인 정치, 경제 영역 및 일상 영역에서 평등, 자유, 정의, 입헌, 이성, 등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통해 국면을 설정할 예정이다. 대중문화를 분석하되 통사적, 국면적, 계보학적으로 개인, 자유, 자유주의가 —다른 개념과 함께— 다뤄진 방식을 분석한다. “정치적 자유가 한정되었음에도 일상생활에서의 평등과 자유가 증진했던 시기” 같은 방식으로 국면을 규정하고,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대중문화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자유를 막는 권력과 자유로운 개인 간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국면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벌어진 동학을 적어보겠다.

근대, 계몽, 자유로운 개인은 우리에게 함께 도달한 사건인 셈인데 한국의 경우는 그 시작점을 언제로 잡아야 할까. 자유로운 개인, 혹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일 때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자유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의 경우 집단적 삶에 대한 인식만 지니고 있을 뿐이어서 집단, 사회와 떨어진 ‘개인’을 자각하고 인식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독립신문> <한성순보> <한성주보> 그리고 해외 유학이나 교류에 참여했던 지식인, 사상가들에 의해 그 시작이 이뤄졌다. 계몽은 다른 경로로도 이뤄졌다. 외국 소설의 번역을 통한 문물의 소개가 이뤄지기도 했다. 

 

3. 대중문화 속 개인과 자유

1) 연애의 시대 (번안 소설 『장한몽』과 이광수의 『무정』)

『장한몽』과 『무정』은 둘 다 연애와 결혼을 다룬다. 연애 소설의 근대적 인물은 봉건적 가족(제도)가 갖는 힘, 그가 지닌 관습과 갈등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존재였다. 『무정』에서는 근대적 인물이 과거의 제도, 관습을 이겨 떨쳐낸다. 『장한몽』의 주인공들은 그와 갈등하거나 굴복한다.

번안 소설 그리고 근대 소설의 등장은 심리를 가진 개인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개인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깨우치는 계몽의 과정을 거쳐 탄생할 수 있었다. 대중적 교육이 늘어나면서 근대적 개인의 폭은 두터워지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여기선 신문 연재 소설)도 유행할 수 있었다. 그처럼 심리적 개인을 발견하고 그에 포착하게 된 대중적 장르가 이른바 연애 소설이다. 애인을 선택하고, 결혼할지 말지를 따지게 되는 전 과정이 봉건적 과거와는 달리 개인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 곧 연애 소설이다. 근대적 개인이 가장 먼저 모험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연애라는 사건이다. 그래서 근대 초기엔 연애의 이야기가 넘치고, 연애와 결혼은 가장 중심적 이야기 주제가 된다.

2) 만주와 미국의 경험 (얼마나 자유로운 개인일까)

한국인에게 만주와 미국은 어떤 의미일까. 만주와 미국은 모두 일본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직접 그들과 조우하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만주는 일본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일본화된 조선인으로서 만주를 대한다. 때로는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때론 2등 시민인 조선인으로 나선다. 그러나 일본인이 될 수 없고 현실에서는 일본인의 감시를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객체로서의 일본, 그러나 닮을 수 있을 것 같은 일본 그 둘이 충돌하면서 양가적 태도의 조선인이 된다.

미국의 경우 일본인을 넘어선 진짜 강자로 경험했고 또한 상상한다. 같은 황색 식민지인인 일본을 넘어선 미국인에 대한 동경 탓에 할리우드 영화와 재즈는 더욱 감미롭게 다가왔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찾아온 미국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상상이 아닌 현전하는 존재였다.

피식민의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가진 개인이 되게 하였을까. 피식민을 경험했으니 제국 권력을 혐오하고 그로부터 멀리하는 자유스러운 개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만주 벌판을 달리는 일본이었다가 다시 그 일본인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백인을 동경하며 그들의 식민인이 되는 상상을 하는 그런 존재였을까. 식민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자유를 찾았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얻은 자유로운 개인은 제국, 인종, 식민 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였을까.

 

3) 반공으로 자유를 치다

「자유부인」과 아프레걸 담론 모두 전후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보여준 시도들이다. 과소한 정치적 자유는 개인 사생활에서의 자유 과잉으로 흘러갔다. 즉 일상에서 자유는 방종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그 현실 지적은 여성을 내세워 훈계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자유반공주의 사회에서 보자면 그런 행위야 말로 공산주의가 행하는 악행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내용을 경계와 훈계를 보낼 뿐 조절해낼 수 없다. 그럴 힘이 없는 가부장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기다리는 것이고, 더 강한 반공주의를 발동하거나 가장들이 다시 일자리를 차지하며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 외는 큰 도리가 없다. 이 시기의 여성들은 이미 자기 결정을 하는 존재임을 넘어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 욕망을 남성은 다른 식으로 파악하고 부정성을 표하지만 통제할 만큼 큰 힘을 갖지 못한다. 여성의 의지로 만들어진 자유가 아니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은 더 이상 거스르기 힘든 일이 되었다. 자본주의 심화, 시장에서 직업을 얻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경쟁하고, 그 결과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물론 그럴수록 남성의 불안은 커져갔다. 더 강하게 반공으로 가고,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챙겨주며, 주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일본이나 미국처럼 강한 나라 혹은 제국을 꿈꾼다며 박정희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4) 도시 주체와 망향 주체

1960년의 군사 정변은 정적인 한국 사회를 동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모든 낡은 것을 일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민족 중흥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언제든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새로움, 변화, 개발의 정조가 넘치는 시대를 맞았다. 대중음악에도 그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1960년대의 트로트는 그 이전 트로트에 비해 훨씬 강해진 보컬로 표현되었다. 구조의 복잡성도 증가했다. 전주에 여러 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노래가 다양하고 많은 코드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1960년대 트로트의 변화는 도시 사회의 심화된 갈등 구조, 복잡해진 도시 사회를 반영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스탠더드 팝 외에도 1960년대는 영미 대중음악 포크나 팝을 받아들인다. 전쟁 전후해 태어난 젊은이들은 새로운 음악 형식과 내용에 열광했다. 이들은 애초부터 도시적 삶을 산 사람들처럼 보였다. 온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도시적 삶의 주인공이 된 자유민으로서 이를 수용하였다. 망향을 하지 않을 존재, 그래서 혈연이나 지연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전에 비해 훨씬 더 근대적인 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1960년대 들어 근대적 도시 생활을 이어가면서 두 부류의 인구층이 발생해간다. 도시 안에서 개인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쪽. 봉건적 가족 제도와는 결별해 살아가며 행복해하는 개인, 그 자유스러움 자체가 고통이 되어 항상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를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과 개인들, 앞의 세대에 비하면 가족이나 가문, 친족, 연고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구층이 더 늘어나는 시간이긴 하다. 하지만 상당한 정도로 아직 망향의 주체들은 남아 있다.

 

5) 텔레비전 위의 젊음과 자유

1970년대는 이른바 텔레비전의 시대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는 최대한으로 제약을 받았던 1970년대였다.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있었던 청년 세대의 반란은 한국 땅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1970년대 초의 청년문화의 등장이다.

베이비부머 세대 중 대학을 다니는 이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있었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기운을 대중문화적 요소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의 표현으로 가능한 영역이었으므로 1960년대 있던 도시 공간에서의 활동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포크 음악, 록 음악 중심의 대중가요와 대중소설, 영화 등이 상호 교차하였다. 

청년문화는 다른 세대 문화와 구별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 대학생집단이라는 뚜렷한 코호트 2) 기성세대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자기 표현. 3) 엘리트에 의한 생산 – 대중문화 생산 엘리트. 4) 음악, 문학, 영화 등이 상호 교차해서 만들어짐. 5)스타일의 구축 – 평범한 정상에서 벗어난 스타일.

청년문화에 대해 애초 텔레비전은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젊은 문화에 대한 국가 개입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은 모습을 달리하며 젊음과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 같은 경향은 텔레비전 역사 내내 이뤄진다. 젊음, 새로움, 도시의 노래가 텔레비전에서 주류화(mainstreaming)되었다. 

6) 1980년대 (저항의 시대)

1980년대는 교복 자율화, 컬러텔레비전, 프로 스포츠 활성화, 통금 해제 등을 내걸어 문화적이라는 이미지를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정권 자체가 폭력적이었고 그에 대한 저항 또한 강했기에 이 시기는 저항의 정치 시대로 규정지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런 틈새를 뚫고 문화 영역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진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1980년대 문화적 사건을 들라면 향락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른바 대중문화를 통해 정권에 대한 저항을 막고자 했다. 이 같은 외양은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풍경을 향락에 젖었거나, 다양하지 못했던 시절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한 대중문화가 아닌 형태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거나 감상되는 문화적 내용들이 1980년대에 활발히 이뤄졌다. 대중문화를 통해 자유를 쟁취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물론, 뺏겨버린 민중의 자유(노동조합, 농민조합, 생활권의 요청, 빈민 운동 등)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대중문화의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 기성 대중문화를 제국주의적 기획이거나 국가와 재벌의 연합으로 인한 민중 수탈의 수단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맞설 수 있거나 그를 교정하기 위한 대중문화를 기획하였다. 그때 자유는 민중 훈화를 내세운 쪽에게는 반드시 쟁취해야 할 민중의 권리를 의미하였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의 대중문화는 적어도 세 겹의 구조를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민중 문화, 상업적 향락 문화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아니면서 의식 있는 창작자로서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대중문화 생산 집단. 그 갈등으로 혹은 그 차이들로서 이후 1990년대의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단계로 이어지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7)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그리고 확장하는 시야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한국 연예계는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하게 된다. 대중문화의 생산 주체에서의 변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수용하는 측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등장한 존재들이 이른바 ‘신세대’ ‘엑스세대’다. 

신세대는 “기성세대 혹은 구세대와 차별화되는 취향과 행동 양식 그리고 탈권위주의와 탈전통적인 자기주체성을 발현하는 집단”이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주의를 추구하며, 소비와 취향을 중심으로 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한다. 소비적인 삶을 통해 욕망을 드러내고 충족하고자 한다. 자유분방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규범에서 일탈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치 실현을 구가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그리고 신세대론의 등장으로 인해 전과는 다른 문화적 실천이 이뤄지고 대중문화계는 화려해진다. 생산의 기원을 따지는 일이 줄어들고, 기원과 국적을 초월하는 듯한 텍스트의 생산이 이뤄졌다. 마침 다시 한번 이뤄진 미디어 산업의 확장(케이블 방송의 시작, SBS 방송의 시작, 지역 민방의 시작)과 비슷하게 이뤄진 주변 국가들에서의 미디어 시장의 확대로 문화 컨텐츠의 확보가 필요했고 한국의 다양한 연행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 요청에 응하였다. 이른바 한류의 시작이다. 

그러나 한류의 시작은 한국 대중문화가 해외에 눈을 뜨고 시야를 키우는 계기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침투한 신자유주의 바람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신세대론에서는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소비하고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한 담론이 더 커진다.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런 흐름은 더욱 강해졌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글로벌화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한국 내의 주체의 시야도 넒어졌다. 이제 그들이 구가하고자 하는 자유의 폭은 과거와 상대가 안될 만큼 광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여 년은 부동산 투기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 증식이 사회를 휘감았다. 한국 시민의 자유는 전에 없이 전혀 다른 척도를 갖게 된다. 신세대는 문화자본을 키우려 했지만 그 부모 세대는 같은 시기에 물질적 자본의 크기를 키우며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운동의 무한 확장을 챙겨주는 이념이고 시장 현실이다. 국가는 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모든 것을 걷어낸다. 그럼으로써 자본의 운동은 과거보다 훨씬 빨라지고 광범위해진다. 자본의 운동 자장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영역이 없어지게 되었다.

 

8) 한류(코리아부 이야기), OTT시대, 아포칼립스 드라마

한국의 드라마들이 넷플릭스 등 OTT에서 빅 히트를 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지상파 방송이 지닌 한계를 넘어 심의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 시장을 향하고 있기에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나 표현 양식과 한국적인 내용과 형식을 같이 드러내야 하는 문제. 그런데 대체로 세기말적인 현상을 드러낸다. 아포칼립스 장르를 주로 만들어내고 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은 세기말적이고 묵시록적인 작품이다. 묵시록적이라 함은 가장 최신 버전의 위기 담론이란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최신 버전과 가족의 구성을 꾀하다 좌절된 『장한몽』 사이에는 근 100년의 시간 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묵시록적인 드라마 안에 ‘신파성’에 가까운 요소가 들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개인의 자유 의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고 신파성을 떠올렸다. 신파성을 두고 한국 대중문화의 유전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언제나 한국의 가족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래서 늘 우리는 부자유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진단일까.

한류에 푹 빠져들어 한국의 여러 피상적인 면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두고 코리아부(Koreaboo)라고 부른다. 이는 경멸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무조건적 추앙을 취미로 가졌다는 점에서 경멸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코리아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국뽕’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오징어 게임」이 상을 받아도 한국이 최고, 「기생충」이 잘되어도 한국이 최고, 코리아부가 많아져도 한국이 최고라는 언급이 만연한다. 한국이 관련되는 것이면 모두 한류가 되고,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 이른바 “K” 과잉의 시대를 맞고 있다. 오래전 만주와 미국을 상상하며 가졌던 제국의 욕망이 이제 문화적인 영역에서 실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스러운 개인으로서 그 같은 제국적 집착, 민족적 집착은 근대의 어두운 길을 걷는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민족과 제국 안으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일 수도 있다.

새로운 과제가 떨어졌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와 실천이 국경을 넘어야 한다. 초국가적이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스러워질 수가 없다. 민족, 국가는 『장한몽』 시대 그렇게 자유로운 근대인을 막던 봉건적 가족과 같은 존재이므로. 한류를 세계가 경험하는 같은 현상으로 파악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적을 수 있는 초국가적인 기술을 요청하는 쪽이 늘고 있다. 이른바 Transnational Approach다.

 

4. 분석의 정리

우리는 식민지 근대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으로 태어났다. 식민지였으나 근대성을 누렸고 그래서 봉건적 잔재들과 싸우는 과정을 거쳤다. 처음엔 연애 서사를 통해 그를 익혔다. 일본 제국의 식민 경영에 참여하면서 제국을 욕망하기도 했다. 그 욕망 충족을 위해 일본인이 되는 상상을 한 이들도 있고 그럼으로써 트라우마를 갖기도 했다. 자유스러운 개인이 된다는 것은 근대적 욕망을 취하는 것이 되면서 (즉 자유스럽지 않게 되면서) 자기 분열이 발생한다. 만주의 경험이 그런 예이고 실제 한국 사회를 20여 년간 철권 통치를 했던 박정희가 바로 그 경험의 소유자다.

해방과 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이 펴는 모든 것은 신선하고 배울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춤바람까지 그랬다. 1950년대의 여성들의 외출은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 아닌 방종으로 이해했다. 방종의 여성에겐 징벌이 따랐다. 하지만 그 징벌과 비윤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구가된 자유를 침묵하게 만들 순 없었다. 잠시 집으로 돌아간 것은 같은 여성들은 가정 근방에서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고 또 새로운 자유의 메뉴를 찾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김수현의 홈드라마나 멜로드라마에서 일상에서의 자유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1950년대 구체적으로 조우하게 된 미국을 보다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것은 1960년대다. 스탠더드 팝이 등장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포크, 록 음악을 수용하면서 직접 미국을 소비하게 된다. 기타를 통한 변주도 가능했고, 그들의 노래를 번안하여 부르고, 미8군 무대를 기반으로 커버하면서 일정 거리를 둔 주체와 객체가 아닌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과도한 일체라며 브레이크를 거는 측이 있었고 그 일체에 민족주의의 양념을 치는 움직임도 있었다. 아마 그런 작용과 반작용으로 미국화(Americanization)는 혼종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숨막힐 정도로 제한되고 있었다. 공적 사안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숨죽여가고 있었지만 일상에서의 자유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크고 있었다. 물적 토대가 과거와 달라졌고 쇄국을 할 수도 없는 입장에서 그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1960년대의 영미 팝의 수용, 1970년대 청년문화의 경험, 1970-80년대 젊음의 기운을 챙겨낼 사회 전반의 컬러 변화는 정치적인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자유 신장에 큰 역할을 한다.

이른바 장르의 계층화론을 무너트릴 수 있을 만큼의 변화였다. 1980년대에 ‘땡전 뉴스’라는 용어가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소식을 시보와 함께 전한 것에 대한 조롱이었다. 뉴스는 전두환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전두환을 닮은 코미디언이 주름을 잡고 있었다. 그의 우스꽝스러움 자체로 수용자들은 폭력적인 대통령을 떠올리며 그를 텔레비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하였다. 코미디가 뉴스보다 훨씬 더 유용한 경험을 한 것이다. 장르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정치적 자유는 한정되었으나 문화적 자유는 그런 식으로 그 사이즈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성장은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의 대중문화판이 환해지고, 신세대론이 등장하며 그 수많은 장르가 쏟아져 나왔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자유의 구가엔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그 영웅일 수도 있다. 2020년대 들어서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전 세계에서 방영되고 환영을 받고 있다. 연출의 솜씨, 연기의 솜씨도 있겠지만 신파성과 같은 요소가 아직 그에 담겨 있고 그럼으로써 독특함을 선사하고 있음을 잊진 말아야겠다. 「오징어 게임」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당뇨병 치료를 위해 목숨을 건 도박에 참여하고, 북한에 남겨둔 부모를 모시기 위해 탈북한 어린 소녀도 그 게임에 참여한다는 설정은 『장한몽』에서 읽었던 감수성과 엄청날 정도로 거리를 두고 있진 않다. 대중문화의 전통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감수성에 관한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한국의 근대적 개인은 아직 자유스럽지 않다. 물론 전과는 다른 가족관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가족을 갖기를 꿈꾸지만 가족이라는 단위와 결코 결별한 적이 없는 경험을 갖고 있다. 그 가족은 식구들로 구성된 가족일 수도 있지만 국가나 민족의 은유일 수도 있다.

가족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 보이다가도 가족은 굴레가 되거나 동기가 되어 늘 되돌아온다. 돈 있어야 최대한 자유를 누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면 가족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한다. 과거 평범했던 가족의 자격은 상위 계급만 누릴 뿐이고, 영업 공동체, 생존 공동체 등으로 남아 있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원용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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