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은 ‘도와주는 손’의 존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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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은 ‘도와주는 손’의 존재에 달려 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2.27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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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다시 보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 장경덕 지음 | 글항아리 | 352쪽

 

올해는 애덤 스미스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다. 『국부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자유와 경쟁을 세계의 지고한 이상으로 자리매김시켜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그린 이상은 왜곡된 채 살아남은 반쪽은 그의 『국부론』이며 시간 속에서 유실된 반쪽은 『도덕감정론』이다. 그의 사상은 진보·보수, 좌파·우파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진영 논리로 덧칠한 신화가 됐다. 

이 책은 스미스에 관한 오래된 신화를 탈색시킨다. 각기 다른 자유를 말하는 진영들이 이념의 전투를 벌일 때, 애덤 스미스는 양날의 칼이 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은유인 ‘보이지 않는 손’만 해도 그렇다. 정작 스미스가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단 세 번뿐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시장에 전부 맡기라는 자유방임의 철학이라 믿고, 다른 이는 특권과 독점을 폐기하고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라는 혁명 구호로 풀이한다. 이렇게 해석이 엇갈리는 와중에, 이 책은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려 하기보다 되도록 애덤 스미스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한다. 

애덤 스미스에 대한 해석은 특정 시간과 장소의 산물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스미스를 계승하면서도 그를 “엉터리 부르주아 경제학자”로 몰아가며, 그의 이론이 자본가계급을 보호하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20세기 중반 미국 자본주의 이론의 병참기지였던 시카고에서 애덤 스미스는 시장경제의 놀라운 비밀을 밝힌 영웅으로 격상된다. 인간의 행동을 분석할 때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유일하게 타당한 전제로 삼았으며, 정부의 ‘무거운 손’이 아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만이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식이었다.

‘애덤 스미스 문제’라는 말이 있다. 그의 사상에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가령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복에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국부론』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고 했다.

저자는 스미스의 ‘공감하는 인간’과 ‘자기 이익을 좇는 인간’을 대립항으로 놓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시장이 자유롭고 공정하다면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으로 유익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시장이 공정하려면 신뢰와 공감과 정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은 ‘도와주는 손’의 존재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스미스의 한쪽 얼굴만 바라봤던 것이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를 편파적인 오해에서 구해내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부터 다시 파헤친다. 그가 말한 자유는 기본적으로 ‘자연적 자유’다. 특혜나 제한을 주는 모든 체제가 완전히 제거되면 자연적 자유가 확립된다. 이때 자기 처지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강한 원동력이 되어, 권력이나 법률의 개입 없이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준다. 다만 스미스는 여기에 “정의의 법률을 어기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자연적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은 철폐돼야 하지만, 모든 규제와 제도가 사라지면 사회는 개인들의 이익이 부딪치면서 붕괴될 것이다.

그가 주창한 자유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야경국가 체제로는 수행할 수 없는, 부정의를 막고 이익의 충돌을 중재하는 적극적 개입에 기반한 자유였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은 오해의 극단을 보여준다. 자연적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고민과 갈등과 조정을 거쳐 추구해나가야 하는 이상이다.

애덤 스미스가 이기심의 옹호자라는 해석은 또 하나의 단편적인 오해다. 오히려 그는 일생 동안 『도덕감정론』의 개정을 거듭하며 공감하는 인간상, 이타적인 인간상을 정립하려 애썼다. 이 책은 스미스의 도덕론을 세심하게 살피며 평등의 길을 모색한 도덕철학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는 노예해방선언보다 한 세기 앞서서 노예제를 비판했고,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해가 부딪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못 가진 자 편에 섰다.

저자는 스미스를 충실히 재해석한 이후, 지금을 사는 우리 곁으로 그를 데려온다. 지구의 부는 어디로 이동하고 있나?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까? 대한민국은 지난 세기의 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변화를 선도하고 부를 창출할까? 스미스가 명쾌한 답을 내줄 수는 없다. 새로운 기술이 낡은 체제를 뒤엎고, 초국가적 거대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며, 극심한 양극화가 사람들을 갈라놓는 오늘날의 사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통찰은 지금도 깊은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다면성을 이해하려 시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경제와 사회를 다시 바라볼 단초를 제공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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