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여자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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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여자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2.27 0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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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 김성경 지음 | 창비 | 256

 

남북이 분단된 지 어느덧 78년이 되었다. 분단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생을 다할 때가 되었으며, 한국 현대사에 깊게 드리워져 있던 북에 대한 적대감보다 북에 대한 거리감이 훨씬 더 압도적인 감정이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북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래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라는 키워드로 분단의 문제를 탐구해온 저자는 북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며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학술적 글쓰기에 갇히지 않고 산문, 소설, 편지 등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북조선 여성들의 역동적인 삶을 복원해낸다. 사회과학적 연구와 통찰에 기반한 상상력을 덧입혀 소개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는 전쟁, 분단 등의 역사적 파고 속에서 한 여성의 삶이 어떠한 궤적을 그렸는지 추적하는 곡진한 기록이다. 여성 한명 한명의 삶은 분단체제가 압도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국경을 초월해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민낯을 파헤친다. 한편으로 전쟁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극복하는 여성들의 실천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1부에서 저자는 북조선 매체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소개한 북조선 여성들의 삶을 재구성한다. 저자는 북조선체제가 구현하고자 하는 ‘인민의 전형’인 이들이 여느 북조선 여성과 같은 삶을 살아갔다면 겪게 되었을 경험과 감정을 인터뷰 데이터에 기초하되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서사화한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서 그리는 북조선 여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손쉽게 떠올리는 북조선 여성들의 이미지나 서사와는 사뭇 다르며, 북한에서 선전하고자 했던 영웅적 삶과도 거리가 있다. 저자는 소설, 영화, 다큐멘터리 등 기존의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텍스트와 비평적 거리를 둔 채 그 속에 암호화되어 있는 실제의 삶들을 충실하게 복원해냈다.

2부에서 저자는 북한학을 연구하면서 접한 조·중 접경지역의 북조선 여성과 조선족 그리고 일본에서 만난 자이니찌(在日)와 탈북여성을 소개하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한 저자의 감정적 변화를 산문, 기행문 등의 형식을 활용하여 전달한다.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가부장적 체제에서 ‘어머니’ 역할에 골몰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어떤 이들은 좀더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성을 체현하기도 한다. 수많은 얼굴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남한사회와 사람들의 정체성에 깊게 내재해 있는 분단을 반추할 기회이기도 하다. 

3부에서 저자는 자아문화기술지의 형식을 빌려 사회학과 북한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구자 ‘나’를 성찰적으로 분석하면서 북조선 여성의 삶에 매료된 이유를 추적한다. 또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연구자로서 사회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과정을 반추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연구가 스스로의 위치성과 서사를 재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특히 마지막 장 ‘경계인, 연구자’에서는 저자의 연구자로서의 삶을 위치성의 맥락에서 되돌아본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떠난 저자에게 영국에서의 삶은 지독한 열등감과 불안감에 괴로워한 시간이었다. 젠더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위치로 인한 권력의 작동을 절감한 저자는 한반도라는 맥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탈식민주의와 젠더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는 것으로 연구 방향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식민과 분단 구조에서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북조선 여성, 조선족 여성들이 보여준 행위주체성은 저자에게 전복과 해방의 실마리를 안겨주었다. 중심만을 지향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저자가 가장 낮은 서열에서 자매애와 가족애를 실천하는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는 장면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저자는 이러한 진솔한 고백을 통해 ‘타자와의 만남’이 가져다준 놀라운 경험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국경이나 체제 경쟁과 같은 견고한 틀을 소위 가장 약하다는 여성, 그것도 자본주의적 기준에서는 가장 가난한 북조선 여성들이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저자의 질문을 우리 사회가 함께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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