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휴먼과 호모 엠파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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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휴먼과 호모 엠파티쿠스
  • 김성규 동국대학교·문화학
  • 승인 2023.02.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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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최근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가 된 콘텐츠가 있다. 1980년대 방영을 시작해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야말로 국민 드라마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던 『전원일기』의 인기 캐릭터 ‘응삼이’를 연기했던 故박윤배를 디지털로 복원한 것이다. 이른바 ‘디지털 휴먼’으로 복원된 故박윤배는 생전 모습과 매우 흡사한 수준으로 『전원일기』에 출연했던 연기자들 앞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놀라운 건 단순히 그의 생전 모습만이 디지털 영상으로 복원된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 표현까지 하는 등 ‘상호작용’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복원이 됐다는 점이다. 故박윤배와 함께 오랜 시간 연기를 하고 동료로서 지냈던 김용건이나 김수미, 독고영재 등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속 故박윤배를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이내 한 마디씩 걸기 시작했다. 결혼식 몰래카메라를 찍었던 이야기부터 『전원일기』를 찍던 이야기, 사적인 추억 속 이야기들까지 하나하나 풀어놓으면서, 그들은 마치 故박윤배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하며 추억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 풀어놓았다.

                                              故 박윤배와 전원일기 식구들의 소중한 시간

2020년 12월 18일 故박윤배는 분명 사망했다. 『전원일기』의 동료들 역시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故박윤배의 사망을 망각이라도 한 듯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감격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히 높은 지성을 갖춘 인간에게는 매우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실재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에서 타인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깊게 공감하며 마치 그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여길 수 있는 인간만의 능력을 포착했고, 그런 독특한 능력을 갖춘 우리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라고 명명했다.

동료 출연자들이 故박윤배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는 모습을 보면, 우리 인간의 공감 능력은 생과 사의 영역에 대한 제한도 개의치 않고 확장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호모 엠파티쿠스로서의 고유한 능력은 디지털로 복원해낼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가면 갈수록 더욱 각광 받는 능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몇 년 안에 실제 인간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AI 인간이 등장할 것이고 이미 사망한 이들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디지털 인간으로서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AI 인간이나 디지털 휴먼은 딥러닝 기술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대화 메커니즘을 확장하고 고유의 정체성을 갖추며 성장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우리 앞에 나타난 디지털 휴먼이라는 새로운 존재에게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여 공감 영역을 확장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아주 높은 확률로 우리 사회가 디지털 휴먼을 공감의 대상으로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본다. 수년 전에 등장했던 개 모양의 로봇 ‘스팟’(Spot)의 균형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기 위해 스팟을 발로 차던 개발자를 욕하면서 스팟이 느낄지도 모르는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많은 이들의 사례를 보면, 실제 인물을 복원한 디지털 휴먼에 대한 공감은 더욱 유연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생명체도 아닌 로봇의 고통을 ‘상상’하여 연민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고서 보면 대부분 호모 엠파티쿠스이다. 그런 우리에게 너무나 그립지만 볼 수 없게 된 이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복원하고 대화까지 가능하게 만든 디지털 휴먼에 대한 공감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현재의 VR 기술은 가상의 디지털 온도와 중량, 촉감까지 느낄 수 있는 촉각 기술(햅틱 VR)을 구현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햅틱 VR을 접목한 디지털 휴먼과 대화를 하는 동시에 온기와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면 공감을 향한 또 하나의 큰 허들을 넘게 될 것이다.

물론 디지털 휴먼의 등장과 그들이 우리 일상으로 편입하는 상황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故박윤배가 비교적 자연스러운 디지털 휴먼으로서 동료 출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기자로 활동했던 덕분에, 그의 영상을 비롯한 여러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영상이나 음성 기록, SNS 활동 등 어떤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디지털 기록 양의 격차는 결국 얼마나 자연스럽게 디지털 휴먼으로 복원될 수 있는지, 사람들의 공감을 얼마나 잘 유도할 수 있는지의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발생시킬 것이다. 정보의 차이가 만들어 낼 디지털 휴먼의 완성도 격차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분명히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인간은 인간 아닌 타 존재에게 꾸준히 공감 능력을 발휘하고 공감의 대상을 확대해 왔다. 수백 년 전부터 우리는 인간 아닌 동물에게도 행복할 권리를 인정해 왔으며, 수년 전에는 로봇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제는 첨단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휴먼에게 호모 엠파티쿠스로서의 공감 능력을 발휘할지를 결정할 시기가 왔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인문학은 당연히 응답해야만 할 것이다. 디지털 휴먼에게 어떠한 인문학적 가치를 요구할 것이며, 또한 디지털 휴먼으로 구현되기를 원하는 이들의 격차는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디지털 휴먼과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과의 관계 맺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고민하는 의무를 지닌 인문학은 늘 그래왔듯, 디지털 휴먼의 등장으로 인한 새로운 인식 전환의 국면에 대한 대답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디지털 휴먼과 더불어 살아갈 숭고한 인간의 자세는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김성규 동국대학교·문화학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수학했고,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인간의 영웅성과 죽음심리학의 관점으로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졸업 후 모교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문화학 전공과 다양한 인문학 교양을 강의하고 있으며, 대학 밖에서 일반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을 즐겨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간의 심리와 문화를 연구한 『인간의 악에게 묻는다: 누구나 조금씩은 비정상』(2022)과 『인공지능, 문학과 예술을 만나다』(공저, 2021)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에서 교육과 연구, 집필 활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모교에서 ‘최우수 강의상’과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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