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 남작의 ‘벌집’ – Fondation 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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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 남작의 ‘벌집’ – Fondation Hardt
  • 송유레 경희대학교·철학
  • 승인 2023.02.2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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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방문기]

 

                                      사진출처: N. Gex, La Fondation Hardt (2016), p. 133

스위스 제네바 근처 방데브르(Vandœuvres)에 자리한 ‘폰다시옹 하르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서양고전학 연구소이다. 1949년 하르트 남작(Baron Kurd von Hardt, 1889-1958)에 의해 설립된 이래, ‘폰다시옹’은 해마다 연구에 목마른 수많은 고전학자들에게 알프스의 ‘옹달샘’이 되어 주었다. 연구자들이 머무는 저택은 현대식으로 개조되긴 했지만 오래된 가구들과 예술 작품들로 채워져 고색창연하다. 이 연구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은 4만 권이 넘는 장서와 100여 개의 학술지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스위스 전 지역의 도서관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대학들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귀한 고서(古書)들이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도서관에는 크고 긴 창문들이 줄지어 있고, 중앙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어서 밤낮으로 빛이 넉넉하다. 

2016년 여름에 처음 방문한 후 다시 찾은 이곳, 많은 것이 그대로 있었다. 저택과 도서관도 그대로, 주방장 하이디 여사도 그대로 있었다. 사실, ‘그대로’ 있었다는 말은 참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세월을 거슬러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종종 오래된 것을 사랑한다. 오래된 것은 세월을 겪은 것이다. 그래서 주름이든 먼지든 세월의 흔적을 지닌다. 앞마당의 거대한 고목에도 수많은 주름이 있었다. 난 이 크고 오래된 나무를 볼 때마다 이곳이 거룩한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짐을 풀고 뒷마당에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정원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벌집들을 볼 수 있다. 꿀벌들이 이제 막 피어난 작은 봄꽃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이 꿀벌들의 천국에 하르트 남작의 묘가 자리한다. 묘지 위로 누군가 오래 전에 두고 간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산책을 하면서 이 연구소가 꿀벌들로 붐비는 큰 벌집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네카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철학자를 꿀벌에 비유했다(Ep. 84. 3). 꿀벌이 꿀을 만드는 데 알맞은 꽃들을 고르고, 필요한 재료를 모아 집으로 운반해서 정리한 후, ‘발효’를 통해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듯이, 철학자에게도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생각할 거리를 세심하게 선별하고 정리하고, 잘 씹어서 삭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난 세상사의 성가심과 번거로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오직 나에게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꿀을 만들 시간. 하지만 ‘남작의 벌집’은 고독한 철학자의 은신처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문헌학, 사학, 철학, 고고학을 총망라한 고전학 연구자들이 함께 공부한다. 연구에 헌신하는 사람들 곁에서 연구에 헌신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게 거룩하다는 세네카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사진출처: N. Gex, La Fondation Hardt (2016), p. 144

여기 모인 학자들은 침묵 가운데 자기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야 한다. 특히, 공동 식사 시간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서로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다. 연구소가 불어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불어가 주로 통용되지만,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도 사용된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유럽적인’ 방식이 남아 있다. 물론, 공부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지적 자극을 받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연구 경험을 전수받기도 하고, 미처 몰랐던 자료에 접하기도 한다. 

하르트 남작은 무엇보다도 이곳이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자들의 교류의 장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는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유럽인들의 공동 유산인 그리스-로마 문화의 진흥을 통해 2차 세계대전으로 갈라진 유럽인들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제 연구소는 유럽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 모든 고전학자들에게 열려 있다. 1952년부터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성과를 책으로 출간한다.

이곳에서는 세상의 무관심과 무시에 익숙해진 고전학자들이 놀랍게도 ‘인간대접’을 받는다. 아무도 ‘인간 가치’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연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입증하길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를 믿고 우리가 하는 일을 지원해 준다. 지난 세월 이 연구소 또한 다른 많은 인문학 연구소들과 마찬가지로 재정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유럽의 고전학자들이 연구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마지막으로 스위스 정부도 힘을 보탰다. 돈 계산이 철저한 스위스가 정신에 값을 매기는 오만을 범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큰 산들 앞에서 겸손을 배운 것일까?  

방학이 끝나간다. 행복한 시간을 뒤로 하고, 마음의 빚을 간직한 채 떠날 때가 임박했다. 이제 나는 ‘복자의 섬’으로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동굴’로 돌아갈 것이다. 혈거인들의 수고를 함께 짊어지기 위해서. 대학이 단지 아귀다툼의 연습장이 아닌 것은 ‘인간다움’ (humanitas)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동굴 밖에서 누릴 수 있었던 빛을 조금이나마 동굴로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이곳에 대한 기억과 함께. 

 

송유레 경희대학교·철학

경희대 철학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주창자인 플로티누스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영혼의 상승과 하강: 플로티누스의 돌봄의 윤리학』 (독일어), 『덕의 귀환: 서양편』 (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 도즈(Dodds)의 『불안의 시대 이교도와 기독교인』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덕의 미메시스: 플라톤의 시(詩) 개혁」, 「의지의 기원과 이성적 욕망: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망 개념 연구」, 「영혼의 모상: 플로티누스의 자연과 영혼의 구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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