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도 하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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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도 하는’ 연구자
  • 이은주 서울대 기초교육원
  • 승인 2023.02.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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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얼마 전에 읽은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번역서는 절대 안 돼.”라는 문장 하나를.

나는 전업 번역가는 아니지만 공역서 몇 권을 낸 적이 있다. 학부 과정에서 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의 길을 밟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데, 그중에는 괜찮다고 알려진, 또는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 외국 학자들의 연구서를 나누어 번역하고 강독하는 모임도 있다. 내 경우에는 그렇게 읽은 책 중에서 “이 책은 출판하면 어떨까?”라는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번역서를 출판하는 험난한 여정에 올랐던 것이다.

전업 번역가라면 출판사에서 책을 선정하고 이 책의 번역에 적합한 사람을 섭외한 뒤 일정한 번역료를 지급하는 ‘업계의 일반적인 과정’을 밟아나가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책을 선택했기 때문에 출판을 결심한 다음에는 출판사에 이 책을 출판해달라는 ‘요청’을 해야 했다. 가뜩이나 책을 팔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굳이 원하지 않았던 책의) 판권료를 내는 이중고를 감내할 출판사는 별로 없다. 몇 차례 번역서를 내면서 자비 출판이나 다름없이 인세를 현물(책)로 받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경우에는 저자와 원서의 출판사에 지급할 비용을 감당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결국 누가 원했던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출판사가 원하는 책이었다면 우리가 번역자로 ‘간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번번이 초벌 번역을 마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섭외해야 했던 우리는 어떻게 보면 진퇴양난에 처해 있었다. 이미 초벌 번역을 끝낸 책이니 손쉽게 출판할 것 같았지만, 그 외에 다른 일들이 해일처럼 우리에게 밀려왔다. 이미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금세 손을 놓았을 것이다. 외적으로는 얻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비감에 젖기도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던 셈이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번역도 하는’ 연구자가 설 자리는 애매하다. 연구자의 입장에 선다고 해도 출판사가 고른 책보다 우리가 고른 책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자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출판사는 판권을 구입하는 입장이고 그 상황은 다소 복잡하거나 미묘할 수 있다. 최근 책이 아니라면 저자의 생존 여부도, 내야 할 판권료가 얼마인가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사정 이전에 그 영역의 연구자가 책을 고르고 읽고 이 책은 출판하면 좋겠다고 판단할 때에는 많은 현실적인 요건을 거의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와 이미 판권 계약이 완료된 책들 너머 어딘가에 숨어있던 괜찮은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그래서 간행된 지 오래된 책이라는 지적이나 폐업 직전이거나 판권 계약에 우호적이지 않은 원서의 출판사 등 예기치 못한 여러 상황을 ‘뒤늦게’ 맞닥뜨린 적도 있다.

‘번역도 하는’ 연구자는 사실 그런 현실적인 고충보다 “다른 연구자를 빛내주는 데에 왜 너의 소중한 시간을 들이느냐?”라는 물음을 들을 때 더욱 심란하다. 우리는 번역서보다 저서를 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고, ‘번역도 하는’ 연구자도 연구가 본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도 타당한 이런 지적을 들으면 쓰라린 심정이 된다. 또 많은 사람들이 번역서를 출간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번역서는 저서와는 달리 ‘눈 밝은 사람’들이 쉽게 오역을 찾아낼 수 있는 냉정한 무대이다. 학계에서는 통용되는 어휘나 구절이지만 일반 독자도 읽기를 기대하는 우리는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 가면서 부단히 교정하고 가독성을 높이는 데에 수많은 시간을 쓴다. 편집자에게 우리는 ‘준 저자’가 되어 작은 의문에도 어떻게든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또 교정 기간 내내 우리보다 더 많이 읽었거나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오역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인 적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실수한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다.

연구자가 번역도 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아닐 수 있겠지만 기묘한 ‘선의’를 가지고 있다. 괜찮다고 생각해서 골라낸 책의 번역서가 우리 영역의 기초 지식이 되리라는 믿음, 번역서가 우리의 학문 토대를 넓혀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연구자는 저서나 논문을 쓸 시간에 자신은 이미 읽은 책을 새로 번역서로 간행하는 길고도 고된 일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이 일을 하면 우리 영역에 도움이 되겠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을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자원해서 떠맡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언제나 번역서가 나올 때면 다시는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번역도 하는’ 연구자는 의외로 ‘구글 번역’이나 ‘파파고’, ‘ChatGPT’ 같은 강력한 번역기의 등장이 반갑다. 그렇지만 번역기의 발전으로 검토해야 할 선행 연구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것을 체감한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번역기의 발전이 경이롭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우리의 연구 영역에서 어떤 활기를 불어 넣어주리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번역기가 발전하면 이용자가 부지런하게 번역기를 사용해서 많은 분량의 해외 연구서도 당연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까.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번역서가 아니라도 일취월장하는 훌륭한 번역기를 통해 우리 영역의 연구자들이 더 넓은 학문 토대 위에서 시작할 수 있기를.


이은주 서울대 기초교육원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한국 한문학 전공. 조선시대 지역 문학과 문화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역서로 『평양을 담다』, 『관서악부』, 공역서로 『명청 산문 강의』, 『중국산문사』, 『고증학의 시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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